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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임원에서 한인 메디컬 프로그램 개발자로 최경희의 성공 스토리
월가 임원에서 한인 메디컬 프로그램 개발자로 최경희의 성공 스토리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5.1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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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체구에 낭랑한 목소리.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힘이 첫 만남에서 느껴졌다. 남성 문화가 지배적인 미국 월가에서 핵심 임원 자리까지 오르며 25년간 금융계에 몸담았던 최경희는 2003년 한인 메디컬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현재 홀리네임병원 한인 메디컬 프로그램 총괄이사로 일하고 있다. 홀리네임병원의 한인 메디컬 프로그램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있는 이민 세대가 더욱 편하게 진료 받을 수 있게 하자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2010년 미국의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홀리네임병원이 발행하는 채권에 등급을 매기면서 한인 메디컬 프로그램의 공적을 높이 사 안정적 등급을 부여했을 정도다. 기자는 태평양 건너 이국 땅에서 건강한 한인사회를 만들어가는 여성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연락을 주고받던 중 학회 발표차 한국을 방문한 그이와 만날 수 있었다.

한인 여성, 미국 월스트리트를 호령하다
4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나 고등학생 시절 동생과 함께 서울로 유학 간 최경희는 1974년 서울여상을 졸업한 뒤 한일합섬과 경남모직에 회계부 직원으로 취업했다. 당시 직장 내에서 유일한 여자였던 그이는 낮에는 직장을, 밤에는 대학을 다니며 미래의 꿈을 키워나갔다.
“당시 회사에 다니던 대부분의 남자직원들은 대학을 졸업해 무역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어요. 저도 그들 사이에서 일하다 보니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갖게 됐죠. 특히 경영이나 회계 쪽으로 더 공부하려면 영어가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퇴근 후에는 명지대 영문과를 다녔어요. 이후 용산에서 미8군이 다니던 메릴랜드대학에 들어가 경영학을 전공했고요.”
고등학교부터 경리, 회계공부를 시작해 회사에서 실무를 배운 그이에게 대학의 경영학 공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외국인이고 수업이 영어로 진행된 만큼 그이는 비즈니스와 영어를 마스터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1978년 월가의 은행들이 처음으로 한국 지사를 내면서 그이는 JP모건은행 경리부장 자리에 지원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그이에게 지점장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부장 대신 과장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한국 지사에서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은 최경희는 메릴랜드대학에서 공부하며 만난 남편 최재섭 씨가 미국으로 떠나는 것을 계기로 월가 본사로 추천 받아 1981년부터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안경희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이는 이때부터 남편의 성을 따르는 미국식 이름인 최경희로 불리게 됐다.
“당시 한국은 물론 미국도 일하는 여성에게 호의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특히 월가는 아이비리그 출신 남성들이 대부분이었죠. 그곳에도 학연을 중심으로 남자들끼리 똘똘 뭉치는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미국 학교 출신도 아닌 데다가 동양 여성인 제가 그 벽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아예 마음을 비우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데 집중하자는 생각을 가졌죠.”
미국에서도 소리 없는 전쟁터로 불리는 월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언어든 실력이든 어느 정도 쌓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예상과 달랐다. 주어진 시간 안에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한 노력은 ‘최경희는 성실한 인재’라는 평가로 이어졌고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승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이에게 인적 네트워크를 쌓는 것과 미국 특유의 문화에 적응하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대체로 유머러스한 편이에요. 때에 따라 다르지만 무겁고 진중한 상황도 유머로 푸는 경향이 있죠. 특히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팀원들을 다독이는 것에서 이런 성향이 요구돼요. 그런데 그 나라의 유머라는 것이 문화를 이해하고 언어적인 특성을 알아야 가능한 것이잖아요. 그래서 매일 점심시간마다 비서를 붙잡아두고 유머 던지는 법을 과외 받았어요. 이를테면 우리나라 사자성어 같은 것이죠. 나중에 미국식 유머를 그들 앞에서 던지니 재미있어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신기해하더라고요.”
또한 미국식 프레젠테이션을 체득하기 위해 회사 업무가 끝나면 바로 뉴욕에 있는 웅변학원으로 달려가 몇 달이고 연습하기도 했다. 이후 고속승진을 거듭하던 그이는 1989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JP모건체이스은행 리스크관리 북미 본부장 자리에 오르며 성공신화를 일궈냈다.

9·11 테러 이후 타인을 위한 제2의 인생 시작하다
미국 내에서도 누구나 부러워하는 월가에서 22년간 일해온 최경희는 10여 년 전 아무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내려왔다. 2001년 9월 1일 수많은 인질을 태운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WTC)와 충돌하며 발발한 9·11 테러사건을 목격한 이후였다.
“제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스치듯 지나면서 테러범들이 납치한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로 날아갔어요. 직원들을 대피시키고 서둘러 지하철을 탔는데 그게 세계무역센터 빌딩 밑을 지나는 마지막 열차였죠.”
삶과 죽음 사이를 비켜간 이후 그이의 인생관은 달라졌다. 다시 떠올려도 끔찍한 악몽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가 여기까지 온 데에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은 동양인 여성에 불과한 저를 이유나 대가 없이 가르치고 도와준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것을 다시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또 나의 뿌리인 한국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어요.”
그이는 뉴저지 파스캑밸리병원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법률가, 회계사 등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병원 이사회에 월가 금융전문가로 소속된 것. 그리고 그해 미국에서 처음으로 한인 환자를 위한 맞춤식 서비스인 한인 메디컬 프로그램을 출범시켰다.
“한인 1세대 중에는 영어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아요. 이분들이 ‘몸이 쿡쿡 쑤신다’ 같은 한국 특유의 표현을 제대로 전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게다가 미국의 의료체계는 한국과 달라 그 과정을 모르면 고생만 하기 일쑤예요. 무엇보다 한인들을 위한 의료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병원에 제안하게 되었죠.”
현재 한인 메디컬 프로그램은 미국 내에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인이 아닌 한인을 위해 만드는 프로그램에 대한 시선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이는 병원 측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당신들이 몸이 아픈 상황이라고 할 때 내 나라에 있는 것처럼 도와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이야기를 했어요. 물론 비즈니스 면에서는 병원에 대한 이미지 향상과 더불어 장기적으로는 수익 차원에서도 윈윈(Win-Win)할 수 있음을 언급했죠.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게 해준다면 장기적인 청사진은 제가 그리겠다고 했어요. 월가에서 일한 경험이 이 일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각 분야의 한인 의사 50명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한인 환자를 위한 접수, 진찰, 진료 통역, 한식 제공 및 이동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한인 메디컬 프로그램은 한인 사회뿐 아니라 미국 병원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최경희는 지난해 유방암 예방, B형 간염 예방, 우울증·조울증 등의 정신건강 캠페인과 무료검진, 수술 등의 활동을 진행하며 한인사회에 건강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켰다.
“이민 1세대의 상당수는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한국에 있을 당시에도 의료보험 혜택을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인 거죠. 그러다 암같이 큰 병이라도 걸리는 날에는 집 한 채가 날아갈 정도의 값을 치러야 하는 일이 생겨 안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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