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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러야 했던 지난 시간 4년 만에 컴백한 가수 이예린, 뜻밖의 고백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러야 했던 지난 시간 4년 만에 컴백한 가수 이예린, 뜻밖의 고백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7.1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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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러 나무 아래>, <늘 지금처럼>은 그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노래들이다. 그녀의 곡들은 여전히 노래방 애창곡으로 불리고 있고, 후배 가수를 통해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지난날의 노래는 어제 들었던 듯 생생하지만 이제는 스무 살의 풋풋한 모습이었던 그녀도, TV를 보며 열광하던 팬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시간을 오롯이 느끼는 나이가 됐다. 지난 2007년 4년간의 공백 끝에 새 앨범을 발표했지만 소속사 문제로 그녀의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또 4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녀는 새 노래 <야래향>을 들고 예의 변함없는 미소로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무대에 서는 모든 순간이 늘 감사해
“얼마 전에 복귀 후 첫 방송 녹화를 했어요. 무대에 오르기 전날까지 엄청 떨려서 잠을 못잤는데 어느 순간부터 설레는 마음이 더 커지더라고요. 관객들이 혹시 제 모습을 잊었으면 어쩌나 걱정도 했는데, 무대 위에서 부르는 예전 노래를 모두 따라 부르시고 새로운 노래까지도 흥겹게 들어주시니까 저 역시 오랜만에 무대에서 즐기다 내려왔어요.”
예전에는 화려하고 특별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새삼 느낀다.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는 지난 공백으로 인한 영향이 컸다. 근 10년 동안 소속사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겪으면서 입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수를 영입하려고 했던 소속사들과 여러 번 문제가 겪고 나니 사람에 대한 불신만 쌓였다.
“회사가 재정이 악화돼 유령회사가 됐지만 저는 계약에 묶여 있었어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지. ‘장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이후에 다른 회사로 옮겼지만 비슷한 일이 반복됐죠. 10년 동안 이런 일을 여덟 번쯤 겪다 보니, 인생이 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건가 싶었어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에 영국행을 택했죠. 그러다 어느 날 그곳 현지인과 어울려 본능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어요. 끝까지 놓지 못할 것이 노래구나 싶더라고요.”
새로운 장르를 접하면서 그녀의 인생도, 노래 스타일도 변화를 맞이했다. 서양에서 사랑받는 불변의 장르 재즈처럼 대한민국에는 트로트가 있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R&B, 재즈, 세미 트로트가 다 달라 보이지만 그 가운데 공통된 핵심을 발견한 그녀는 이번 컴백과 함께 장르 변환을 시도했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늘 지금처럼>을 써준 최수정 작곡가를 찾아갔어요. 대중과 함께 부를 수 있는 곡을 써달라고 했죠. 그중에서 부채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는 <야래향>을 타이틀곡으로 골랐어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저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 무척 기대가 되요.”

부르면 눈물 나는 단 한 사람, 우리 할머니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가요계를 보고 있으면 그녀도 종종 옛 생각에 잠기곤 한다. 요즘 후배 가수들 중에는 중학생, 초등학생까지 등장하고 있지만 그녀도 데뷔 당시에는 열아홉 최연소 가수였다.
“고등학생 때 가수로 데뷔했지만 원래 꿈은 의사였어요. 태어난 지 3일 만에 아빠가 돌아가셨거든요. 지금 의료 기술로는 충분히 살 수 있는 병이었는데, 당시에는 말도 안 되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거예요. 그 사실을 안 이후로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그녀의 어머니는 양가 부모의 뜻에 의해 어린 딸을 시댁에 둔 채 미국으로 새로운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출생 직후의 일을 알 리 없던 그녀는 초등학생 때까지 친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지냈다.
“어느 날 의료보험 카드를 보니깐 삼촌들은 다 ‘자(子)’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저만 ‘손(孫)’이라고 되어 있는 걸 본 거에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에게 당돌하게 물어봤죠. 혹 제가 주워온 아이는 아니냐고요.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죠. 어른들은 좀 큰 다음에 말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는데 출생의 비밀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셈이 됐으니까요. 그때부터 하루에 4시간씩만 자면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여유가 있지만, 전 1등을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심했어요.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몸이 고장 나고 고등학교 때도 또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됐죠.”
남을 살리는 의사가 되려고 공부하다가 오히려 병을 얻은 격이었다. 매일같이 병원에서 우울한 날들을 보내던 그녀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새로운 꿈을 품었다. 몸이 다시 좋아진 후에는 틈만 나면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학교 다닐 때 축제를 하면 사회를 보고 춤도 췄던 것이 다 이때를 위한 것이었나 싶었다.
“할아버지가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의사가 되겠다던 녀석이 갑자기 가수가 되겠다고 하니까요. 그러다 데뷔 초 생방송 중에 크레인이 떨어져 다친 사고가 있었는데, 그때 끝까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다 부르고 내려온 제 모습에 할아버지 마음이 바뀌었어요. 이후로 응원을 참 많이 해주셨는데 <늘 지금처럼>으로 큰 인기를 누리기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까지도 늘 죄송하고 아쉬워요.”
먼저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빈자리까지 모두 채워준 할머니는 정신적인 지주이자 세상에 하나뿐인 방패 같은 존재다. 그녀는 엄마라 부르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준 할머니에게 그저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할머니는 언제나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할머니의 손녀 사랑은 목숨까지 버리실 정도죠. 고등학생 때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매일같이 저를 업고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셨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자리에서 일으키겠다는 심정으로요. 그래서 저도 할머니가 아니라 ‘우리 엄마’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지내왔어요. 저를 낳아준 엄마와는 청소년 시절에 만나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지만, 할머니와는 느낌이 전혀 달라요. 낳아준 엄마는 어린 제 예상과 달리 멋있는 비즈니스 우먼이었고 여자로서 닮고 싶은 멋있는 존재였지만, 길러준 할머니는 무한대의 따뜻함을 가지고 계신 분이거든요.”

어딘가에 있을 그 남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엄마 같은 할머니로부터 요즘 그녀가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남자친구는 없느냐”는 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여자로서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 할머니의 소원이다. 무대 위에서는 카리스마가 넘치지만 평상시 집을 꾸미고 음식을 만드는 데 열중인 모습을 보면 그녀만큼 준비된 신붓감도 없다.
“저 굉장히 여성스러워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꽃시장을 가거나 아니면 이불보를 짜거나 요리를 해서 누굴 먹이는 식으로 풀거든요         (웃음). 제가 봐도 어디에서 나온 여성스러움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요리하는 것만 보면 딱 아줌마 스타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음식도 한식, 중식 가리는 것 없이 다 만들 줄 알아요. 퓨전요리는 기본이고요. 할머니랑 지내다 보니 김치도 직접 담그고 장 담그는 법도 어깨 너머로 배웠죠.”
연애도 결혼도 관심 없는 ‘건어물녀’는 아니지만 싱글로 지내는 스스로를 마주하면 인연이 사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가 떠오르곤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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