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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아가되 똑같기를 거부한다’ 패션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디자이너 이상봉·이청청 父子
‘닮아가되 똑같기를 거부한다’ 패션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디자이너 이상봉·이청청 父子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11.1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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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에게 한글을 입히겠습니다”라고 거침없는 열정을 토해온 이상봉은 ‘한글패션’으로 대성공을 거둔 국보급 디자이너다. 장사익 선생의 편지에서 영감을 얻은 한글 작품들로 파리에서 최고 히트를 친 이후, 한글을 모티브로 한 의상과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연이어 선보였다. 이후 해외에서 ‘한글 옷’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새롭게 끌어올리며 한글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일깨워준 유일무이한 디자이너로 불리고 있다.
국내의 수많은 신진 디자이너들이 닮고 싶어 하는 롤모델 이상봉. 이것은 아들인 이청청 디자이너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많은 사람이 유명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그가 디자이너를 선택한 것을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치열함과 그 밑에 가려진 고단함을 가까이서 보고 경험하며 자랐기에 아버지가 닦아온 길에 도전하는 디자이너로 서기까지의 시간은 결코 쉽지도, 편하지도 않았다. 손바느질, 청소, 커피 심부름부터 시작해 해외 세일즈, 프로젝트 총괄을 맡는 ‘이상봉 파리’의 팀장이자 남성복 디자이너로 활약했던 이청청은 영국 런던에서 시작한 자신의 브랜드 오디토리 헐루시네이션(Auditory Hallucination)의 디자이너로 활동하기까지 아버지의 지난 시간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시간이 더 많은 디자이너 이청청과 아들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는 디자이너 이상봉. 그동안 알 수 없었던 두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디자이너 아들도 디자인하면 고생한다
최근 해외에서 주목받는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의 인터뷰를 엮어낸 <패션 코리아 세계를 움직이다>의 내용을 보던 중 독특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청청. 그의 이름을 처음 봤을 때는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가면서는 ‘앗’하는 놀라움이 새어나왔다. 그가 디자이너 이상봉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상봉에게 아들이 있다니’였다. 그동안 디자이너로서의 모습만을 보인 이상봉에게 결혼, 가정, 자녀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론에 아들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디자이너 이상봉. 그는 이러한 시간이 온 것을 두고 때가 된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녀와 함께 공개적으로 언론이나 대중에 나선 적은 없는 것 같다. 자의든 타의든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이상봉 디자이너로 처음 이름을 알렸을 때는 디자이너로서의 인생만 조명되길 원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이후에는 아들은 런던에서, 딸은 뉴욕에서 일하고 있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노출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청청 디자이너는 ‘이상봉 파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이청청 브랜드 매니저로 쇼의 시작과 끝,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이어를 만나 세일즈를 하고 해외출장을 가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 등을 한다. 선생님(아버지)이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을 좋아하시기도 하고,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하셔서 정말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름이 참 독특하다. 이청청. 누가 지어준 이름인가?
이청청 맑고(淸) 푸르게(靑) 자라라는 의미에서 아버지가 지어주셨다. 원래는 아이가 생기면 이름을 ‘나나’라 부르기로 하셨는데, 아들이 태어나는 바람에 태몽에서 영감을 얻어 이름을 지으신 거다. 사람들이 대부분 한 번에 내 이름을 기억하기 때문에 학창시절에 나쁜 짓도 거의 못했다. 대신 이름 때문에 놀림을 꽤 받았다. 당시 한창 잘 팔리던 변기 세정제 이름과 같아서다(웃음).
아버지가 디자이너라 어린 시절 친구 사이에서 옷 잘 입기로 소문났을 것 같다.
이청청 고등학교 때 밖에 나가서 놀아야 하는데, 정장이 없으니 아버지 옷장에서 종종 옷을 꺼내 입곤 했다. 아버지 옷 중에 주름이 5개 잡힌 이세이 미야케 바지 같은 것들 말이다. 집에 있는 옷 중에 골라 입고 나갔을 뿐인데, 밖에 나가면 나만 엄청 튀는 식이었다.
보통 학생 때 엄마, 아버지 옷 몰래 입다가 혼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청청 아버지가 매일 늦게 들어오시니까 몰래 살짝 꺼내 입었다(웃음). 아마 지금까지도 말 안하면 모르셨을 거다.
정말 몰랐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버지에게 이청청이 슬며시 웃음을 보낸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작업과 쇼를 보며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처음부터 디자인을 전공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그는 대학입시를 앞두고 평소 재밌게 공부했던 역사교육을 전공으로 택했다. 대학을 졸업하며 진로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디자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는 유학길에 올랐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인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맥퀸 등을 배출한 영국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디자인 미술학교를 다니는 동안 창조적이면서 독립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웠다. 

런던에서 학교를 다니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청청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는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키워주는 곳이다. 주제만 던져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만들어가라는 방식이다. 한국에서 몸에 밴 교육방식으로는 힘들 수밖에 없다. 때문에 첫 학사생활이 너무 수동적이었다. 그래서 군복무 후, 두 번째 유학 역시 같은 학교로 갔다. 그때는 남성복 디자인을 전공으로 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많은 것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런던에는 얼마나 있었는지?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외국에서 풍족하게 유학생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배고프게 지낸다. 어느 쪽에 속했나.
이청청 첫 유학은 4년 6개월, 중간에 군복무 때문에 한국에 4년 정도 머물렀고 그 이후에 다시 4년 6개월 정도 유학생활을 했다. IMF가 터진 후에 갔는데 런던 물가가 엄청 높았다. 영국에 도착한 첫날 동네 슈퍼에 갔는데, 모든 것이 비싸서 무엇을 살지 고민하느라 2시간 넘게 서 있었다. 한국에서는 대학생 때 과외로 쉽게 돈을 벌었지만 유학 와서 현실을 다시 보게 됐다. 그래서 파트타이머로 접시닦이를 시작했는데, 몇 달이 지나니 너무 피곤해서 돈은 둘째 치고 공부를 제대로 못하겠더라. 시간이 좀 흐른 뒤에는 같은 시간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오히려 집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학업에 집중했다.
어린 시절 부족함 없이 자랐을 텐데, 근검절약하는 게 쉽지 않았겠다.
이청청 당시 여동생도 유학생활을 같이했다. 그래서 더 아끼면서 지냈다. 어릴 적부터 용돈을 넉넉하게 받은 기억이 없다. 그래서 ‘한정된 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마인드가 몸에 배어 있었다.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고 계신지도 알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유명 디자이너였고, 또 파리컬렉션 때문에라도 해외에서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 덕분에 누린 혜택은 없었나.
이청청 먼저 말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이 있더라. 주변에서 잘해주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누구의 아들로 불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제약과 편견을 갖는지 알았기에 되도록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가 전시회나 컬렉션 때문에 파리에 오실 때 나도 매번 가서 도와드리기도 했는데 그땐 정말 통역이나 잡일을 하는 수준이었다.
‘선생님’과 ‘팀장’으로 불리는 아버지와 아들
남들에 비해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고백하는 디자이너 이청청. 외아들로 태어나 혼자 노는 것이 익숙했다는 이상봉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성격은 아버지에게 비롯된 것 같다. 자신이 내성적이라 아들은 친구들과 많이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제대로 못 놀게 한 것 같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말끝에 미안한 감정이 묻어났다.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아이들에게 관심을 못 가졌어요. 그래서 조금 더 도움을 줄 수 있었다면 청청이가 지금 더 멋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죠.”

이청청 디자이너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어떤가.
이청청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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