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20:55 (월)
 실시간뉴스
7080 톱스타 신일룡 별세... 당대 최고 미남배우, 사업실패 등 파란만장했던 삶
7080 톱스타 신일룡 별세... 당대 최고 미남배우, 사업실패 등 파란만장했던 삶
  • 류정현 기자
  • 승인 2022.05.26 11: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080 톱스타 배우 신일룡(74·본명 조수현)이 26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197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이조괴담’으로 데뷔했고 신성일·신영일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로 꼽혔다. 당시만해도 그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배우는 드물었다. 여기에 잔근육이 매력적인 몸매에 연기력까지 더해진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1970년 <이조괴담>으로 데뷔한 그는 16년 간 <평양폭격대>, <섬개구리 만세>, <총각선생>, <석양에 떠나라>, <아라비아 열풍> 등 영화를 통해 활발하게 활동하며 큰 인기를 구가했다. 당대 톱스타 윤정희, 김지미, 강신성일과 함께 1980년대 연예계 역사의 큰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홍콩 쿵푸 영화계의 신화 브루스 리(이소령)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대역 배우로 뽑혀 홍콩에도 진출하기도 했다. 제15회 대종상 영화제 남우주연상, 제10회 청룡영화상 신인연기상도 모두 싹쓸이했다. 1984년 영화 <애마부인2>는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그러다 1986년 <황진이>를 끝으로 영화계를 떠났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온 그는 대학 시절부터 외식 사업을 시작했다. 1970년대 남산에 있는 하얏트 호텔 인근에 ‘그린빌’이라는 레스토랑을 오픈한 것. 그때만 해도 그의 사업수완은 썩 좋은 편이었다. 영화배우로서 얻은 수익보다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훨씬 더 많을 정도라고 한다. 본업은 사업가, 영화배우는 부업이라고 말할 만큼 사업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한창 잘나가는 배우 생활 중에도 레스토랑을 한두 개 늘려갔으며, 봉제 공장까지 차려 롯데백화점에 입점한 ‘샤롯데’라는 브랜드에 납품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지노 사업에 투자했다가 크게 실패한 뒤로 방황했고, 은행 대출까지 받았던 그는 이자를 갚지 못해 제주도 땅과 건물들을 물론 가족들이 사는 서울 아파트까지 다 압류당하며 그야말로 전 재산을 잃는 아픔을 경험했다.

인생 후반기에는 전공을 살려 호두파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청계산 입구에 연 ‘신일룡의 호두파이’는 가맹점이 생길 정도의 맛집으로 성공했다. 고인은 "매일 아침 등산 후 매장에 와 호두파이 반죽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유족으로 부인 채희종씨와 자녀 여진·인준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28일이다.

다음은 2018년 신일룡을 만나 인터뷰한 퀸 기사 발췌 요약.

서울 서초구 청계산 아래에 자리한 ‘신일룡의 호두파이’ 본점에서 만난 신일룡 회장. 어느덧 70세를 훌쩍 넘은 나이에도 그는 한창 중년이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로 젊음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포근한 할아버지 같은 인품이 묻어나는 웃음은 숨길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만든 호두파이를 대접하는 그로 인해 어릴 적 정감 어린 할머니의 추억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왕년의 대스타를 이렇게 가까이 마주한다는 게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온 그는 대학 시절부터 외식 사업을 시작했다. 1970년대 남산에 있는 하얏트 호텔 인근에 ‘그린빌’이라는 레스토랑을 오픈한 것. 그때만 해도 그의 사업수완은 썩 좋은 편이었다. 영화배우로서 얻은 수익보다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훨씬 더 많을 정도라고 하니 오죽했을까 싶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영화배우로 캐스팅됐다는 그는 사실 본업은 사업가, 영화배우는 부업이라고 말할 만큼 사업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한창 잘나가는 배우 생활 중에도 그는 레스토랑을 한두 개 늘려갔으며, 봉제 공장까지 차려 롯데백화점에 입점한 ‘샤롯데’라는 브랜드에 납품하기도 했다.

문제는 7년 동안 홍콩 영화계에서 활동하면서 불거졌다. 밤이면 딸그락딸그락 마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던 홍콩. 그곳에서 처음 도박을 접했다는 신 회장. 사업가의 뇌리에 단연 카지노 사업이 꽂혔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곧장 제주도 중문단지에 번듯한 카지노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기에 이르렀다.

“레스토랑이며 봉제공장을 전부 팔아 그곳에 올인 했어요. 중문단지 땅부터 매입해 건물들을 하나하나 지으며 꿈에 부푼 나날이었지요.”
​​​​​​​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일 중요한 카지노 허가가 불발되고 말았다. 은행 대출까지 받았던 그는 이자를 갚지 못해 제주도 땅과 건물들을 물론 가족들이 사는 서울 아파트까지 다 압류당하며 그야말로 전 재산을 잃는 아픔을 경험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거지요. 제 인생의 바닥을 친 순간이었어요.”
1997년 IMF가 터진 직후의 일이다.

눈물의 호두파이

이때 위기는 또 다른 기회를 불러온다고 했던가. 어마어마한 사업의 실패로 실의에 빠진 그는 2년 동안 방황을 거듭하다 오랜만에 집을 찾았다. 여의도의 작은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과자 굽는 향이 자신을 반갑게 맞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잠도 잘 안 오던 새벽에 주방으로 나가 손에 잡히는 대로 주워 먹었던 과자의 맛을 지금도 절대 잊을 수 없다는 신 회장. 다음날 아침, 아들에게 이 과자가 무엇이냐고 묻자 호두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내가 돈이 없어 매일 끼니를 잘 챙겨 먹지 못해 몸이 많이 야위었다고 하더군요. 외국으로 유학 갔던 아들이 대학을 포기하고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자기 엄마를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팠대요. 무엇이라도 먹여야겠다는 급한 마음에 집에 있는 재료를 뒤졌는데 제일 빨리 만들 수 있는 음식이 호두파이였던 거예요. 요리도 잘 못 하는 녀석이 인터넷을 뒤져 레시피를 겨우 찾아 따라 만들었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서로를 붙잡고 참 많이도 울었지요.”

다행히 그의 아내는 호두파이를 먹은 후 건강을 회복했다. 이에 아들이 만든 호두파이를 옆집과 앞집에 나눠줬다는 그는 나중엔 하나에 만원씩 받고 팔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맛본 호두파이 맛에 반한 이웃 사람들이 먼저 판매를 제의, 주문이 쇄도한 것이다. 이것이 지금 신일룡의 호두파이 사업의 시초가 되었다. (중략)
 

Queen 류정현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