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5-02 07:05 (목)
 실시간뉴스
박근혜 대통령, 김용건·하정우 부자… 초상 작가 이원희
박근혜 대통령, 김용건·하정우 부자… 초상 작가 이원희
  • 이윤지 기자
  • 승인 2014.05.29 07: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길고 복잡한 역사, 생소한 설명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잘 알고 볼 수 있는 전시, 바로 우리 정계와 재계, 문화계 명사들의 얼굴이 주제인 이원희 작가의 초상화전.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이원희의 초상 더 클래식’에서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얼굴들과 함께 중견 서양화가 이원희 작가를 만났다.

취재 이윤지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가나아트센터 제공

‘초상화’라는 말은 어쩐지 숙연한 기분이 들게 한다. 정면을 응시한 채 프레임 안에 박제된 먼 과거의 인물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열리고 있는 한 초상화전이 이 같은 의식을 다른 쪽으로 환기하고 있다. 내밀하고 섬세한 얼굴, 표정이 담겨 있고 말이 없는 주인공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게 만드는 초상화들을 전시한 이원희 작가의 ‘더 클래식’이 바로 그것. 이 작가는 초상화의 위상을 복원하고 우리 미술의 ‘클래식’을 다시금 되짚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원희 작가가 그린 대표적 재계 인사는 박근혜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 2명의 대법원장(윤관·이용훈), 5명의 국회의장 등.
이번 개인전에는 유화와 초상화 50여 점을 비롯해 풍경화와 누드화 등까지 모두 80점 가까이 되는 작품이 출품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반신상과 영국 국빈 방문 그룹 초상, 김영삼 전 대통령, 탤런트 김용건·하정우 부자 등의 초상도 만나볼 수 있었다. 초상화 50여 점 가운데 개인이 주문 제작한 것이 30여 점 된다.
그는 25년간 지도층 인사와 재계, 문화계 인물 300여 명의 초상 작업을 해 왔다. 이번 전시작 중에는 특히 기업가 초상화 작품이 다수 내걸렸다. 황창규 KT 회장을 비롯해 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 정우현 MPK(미스터 피자) 그룹 회장, 남재현 한국크리버 회장,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 최진철 시아스 회장 등이 매스컴에서와는 다른 독특한 시선과 구도 속에 그려졌다.

초상화, 한 폭의 그림이 역사가 되는 순간

이원희 작가는 영국에 간 박근혜 대통령이 버킹엄 궁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만찬을 즐기는 모습을 200호 크기의 화폭에 담아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다. 국빈 만찬장에 들어가는 박근혜 대통령의 시선은 화가의 섬세한 터치로 고매하게 살아났다.
“한복을 입고 영국 여왕과 우리 대통령이 함께 서 있는 아주 괜찮은 그림이죠. 이런 작품들을 전시하는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정착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화가의 앵글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유럽의 오랜 전통이기도 해요.”
역사를 담은 그림 한 점이 없는 청와대의 복도를 드나들며 허전함을 느꼈다는 이원희 작가는 초상화의 중대한 역할과 저변 확대의 필요성을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단순히 유명인들의 얼굴을 그린 작업물로 화제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던 것.
“정치적인 공간에 사진이나 그림이 걸려 있었을 경우 힘이 교체될 때 그 흔적들은 깨끗이 지워져 버리죠. 의도적으로 단절시키기도 하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전의 역사와 시간이 공간에 남아 있지 않으면 복기해야 할 것들, 이어져야 좋을 것들을 놓쳐버리기 십상이죠.”

박근혜 대통령 의원시절, 이원희 작가는 그 측근에게 나중에는 만나기 힘들 수도 있으니 미리 작업을 하겠다는 제안을 해 박 대통령을 몇 차례 만나 스케치 작업을 시작했다. 옥색 셔츠 칼라가 살짝 드러난 특유의 미소가 돋보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을 그린 작은 사이즈의 초상에서는 사진이나 매스컴과는 또 다른 인상이 느껴진다.
버킹엄 궁에 영국 국왕과 함께 선 사진으로 작업한 이번 전시의 대표작을 보며 작가는 ‘멋진 역사의 순간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초상화’라고 말했다.
이 같은 역사적 그림이나 사진이 청와대 집무실 복도에 걸려 있다면 국빈을 비롯한 중요한 손님을 맞을 때 한국의 역사, 중요한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화젯거리에 오르게 되고 어떤 긴 말보다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다. 잘라내는 역사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풀어가는 역사를 지향해야 할 시점이 온 우리 사회에 그림, 특히 시간과 역사를 품은 인물의 초상은 그 단초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그는 말한다.
이원희 작가는 1980년대 말부터 유럽의 미술관을 답사하며 서양 회화의 대가들이 이전 세대의 방식을 계승하면서 장점을 취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하고, 이를 대물림하는 과정을 통해 축적된 거대한 서양 회화의 역사를 실견했다.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는 해마다 다음 세대를 짊어질 미술대학 학생들과 함께 러시아 레핀스쿨로 연수를 하며 단순한 표현의 문제를 넘어 서양 고전 전반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사실주의적 풍경화와 퍼스널리티를 구현한 독특한 초상화 작업을 이어왔다.

 
화가의 시선, 인물들의 새로운 면면을 밝히다

이번 전시에서 관심도가 높았던 박근혜 대통령과 김용건·하정우 부자를 그린 작품 외에도 이원희 작가가 대표 격으로 꼽은 것은 황창규 KT 회장의 초상화다. 처음 황창규 회장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작가는 그가 러시아 미술품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황 회장이 러시아에 가면 마린스키 극장에 꼭 들른다는 것을 알고
그 공간을 배경으로 합성해 작업하게 됐다. 마치 지휘봉을 든 채 오페라를 이끌고 있는 듯한 생동감 있는 포즈가 거대한 역사가 서린 서늘한 푸른빛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실제로 이 모습은 한 강연 단상에 섰던 황 회장을 포착한 것이다. 조직을 이끄는 사람의 초상으로 더없이 좋을 구도다.
원로 화가 권옥연 선생의 얼굴도 눈에 띈다. 이원희 작가의 초상 중 적확한 정면 구도는 거의 없지만, 특히 이 그림은 인물의 한쪽 얼굴만을 볼 수 있어 독특하다. 보랏빛 안경을 낀 채 화면 밖 왼쪽을 멀리 보고 있는 듯한 권옥연 선생의 왼쪽 얼굴은 그 붓질이 남달라 한참을 보게 한다. 다부지게 피부색을 입한 손길에서 선생에 대한 이원희 작가의 넘치는 애정이 느껴진다.
“사진이 담는 것은 한순간의 찰나고 연출된 순간이라면 그림은 몇 날 며칠 손이 가죠. 내 눈과 마음이 본 것이 머릿속에 동시에 저장되지 않으면 손끝으로 나오질 않아요. 이 네 가지 요소가 합치되어야 비로소 이미지가 완성됩니다. 순간을 잡아내 저장된 이미지는 긴 과정을 거치며 손끝에서 나오게 되는데, 그 촉각과 온기가 참 중요해요. 이들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하나의 아우라를 만들게 되죠.”
이원희 작가는 초상화 작업을 위한 사진 작업에서 스냅 방식을 취한다. 편안한 대화 도중 나오는 특유의 표정이나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한 선택이다. ‘더 클래식’의 액자 속 사람들이 늘 보던 얼굴인 것 같으면서도 좀 색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이원희 작가의 독특한 시선과 인물의 의외성을 끌어내는 고도의 소통 기법으로부터 나온다.
그의 초상에는 인물의 생김새와 표정을 비롯해 몸짓과 손짓, 특유의 포즈, 습관이 모두 담겨 있다.

 
이원희의 초상화, 한국 미술계의 블루오션을 열다

이원희 작가는 동서양의 초상화를 실견하고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적인 노력과 함께 초상화를 중심으로 한 미술사를 섭렵함으로써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초상화 장르의 역사와 현실을 냉철히 분석하는 이성적 노력을 함께해 왔다.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굴곡을 거치면서 조선시대 상류층의 문화였던 초상화는 그 맥이 끊어졌으나 이당 김은호 선생과 같이 서양화 기법으로 초상을 그리려는 노력은 희미하게나마 지속돼 왔다. 그러나 체계적인 학습의 과정과 시간의 축적이 생략된 채 받아들이게 된 서양화 기법을 체질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이쾌대 작가의 군상 대작이나,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과 유사한 자화상을 그리는 시도 등은 서양 고전 회화를 제대로 알려는 노력들로 볼 수 있다.
이원희 작가는 이 같은 한국 근대미술의 태동기에 발아했던 초상화에 대한 노력을 중요한 시도로 평가한다. 또한 지난 30여 년간 400~500여 점의 초상화를 작업해 오면서 그는 이 장르가 미술계를 넘어서 사회 전반적으로 인정받도록 하고 후대 예술가들에게 좀 더 넓은 장을 마련해 주고자 하는 선구자적인 노력과 시도를 지속해 오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고전주의 화풍의 그림과 특히 아직까지는 영역이 크지 않은 초상화 부문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촉발시키고자 합니다.”
이원희 작가는 초상화를 영정사진 대용이라고 여기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유럽 등지에서 초상화 문화는 아주 자연스럽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외교적 임무를 안고 인접국에 방문하는 경우가 잦을 정도로 초상화 작가와 초상화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정치인 모델과 화가가 인간적으로 교감하면서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정치적인 문제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기도 하고 외교관이나 실무 관계자들이 풀 수 없었던 난관이 풀리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 작품 80%가 인물, 초상화인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인식 기반은 외려 특이할 정도다.

미국과 유럽의 초상화에는 역사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이 보통이며, 반대로 신화나 전설을 주제로 한 그림에 주문자들이 카메오로 그려져 있는 경우도 많다.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며 조선시대부터 발달하던 우리 초상화 문화는 그 명맥이 거의 끊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의 풍토는 지나치게 빨랐던 우리 사회의 변혁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그 무엇도 탓할 일은 아니지만,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틀인 사실주의 회화, 인물화의 기반을 잃어가고 있는 이 시점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고 이원희 작가는 강조한다.
또한 미술계의 많은 인재들이 회화 시장에 대한 불안으로 순수 예술보다 디자인 쪽을 택하는 경우가 현저히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고급 초상화 시장이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여러 관계자들을 비롯한 대중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다가 작고한 이성자 화백의 초상화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한 포럼에서 그림 강의가 있던 날, 이성자 화백의 아들인 유로통상 신영극 회장이 그를 찾아왔다. 당시 압구정 사옥 2층 전체를 모친의 기념관으로 꾸몄던 신 회장이 작고한 어머니의 초상화를 부탁한 것.
“이성자 화백이 파리로 떠났던 30대 때의 이미지가 참 좋았어요. 젊었던 그 얼굴을 배경으로 하고 돌아가시기 전 모습을 겹치도록 작업했습니다.”
한 사람의 역사가 입체적으로 화면에 담겼다. 화려한 색을 사용해 오버랩한 화백의 노년 모습 뒤로 젊은 날의 얼굴이 흑백으로 배경을 이룬다. 고개의 각이 조화롭게 각기 반대를 향하고 있는 구도는 두 명의 이성자 화백이 모종의 교류를 하고 있는 듯 신비롭게 보이기도 한다. 유족들은 이 그림에 대한 찬사를 마지않으며 이성자 화백 생전의 성정까지도 그림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평을 보냈다.
남재현 한국크리버 회장의 에피소드도 특이하다. 현재 도색 중인 남재현 회장을 그린 초상화는 총 3점이다. 이원희 작가가 초상화를 시작하던 초기에 인연을 맺었던 남재현 회장은 1992년, 1999년, 최근 2014년에 이르기까지 세 번 모델이 되었다. 남 회장의 부인을 그린 작품까지 4점이 전시됐다. 조금씩 변해 갔을 살아온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오래 두고 보는 감회가 바로 초상화의 깊은 매력이 아닐까 싶다.
“미술계에서 초상화는 앞으로 강력하게 자리 잡아 나갈 새로운 시장입니다. 잠재 수요를 개발하는 촉매제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어요.”

이원희 작가는 뛰어난 한국 작가들의 재능을 기반으로 초상 작업이 다채롭게 이뤄지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인간 존재와 정신세계를 비롯해 시대와 역사를 담은 새롭고 정체성 뚜렷한 초상화들이 앞으로 더욱 다양하게 나오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 전환이 급선무다. 이 영역이 실제로 본격화될지에 대해서는 이곳을 찾은 관객들의 눈빛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캡션이 없는 작품전 ‘더 클래식’에서는 어떤 텍스트나 음성도 감상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클래식’하고 ‘베이식’한 인물화 그대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 정형화된 그간의 초상화에 대한 경직된 이미지는 간 데 없다. 그림 속 인물들의 히스토리나 그들의 이름보다도 어떤 고된 여정 끝에 휴식을 취하는지 조금 처진 듯한 어깨, 숲속 어딘가를 들여다보는 눈빛에 매료돼 독대할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