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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투병, 끝내 타계한 ‘맨발의 청춘’ 외아들 준홍 씨, 통한의 사부곡 “아! 내 아버지 트위스트 김…”
4년 투병, 끝내 타계한 ‘맨발의 청춘’ 외아들 준홍 씨, 통한의 사부곡 “아! 내 아버지 트위스트 김…”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1.1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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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파란만장한 74년이었다. 1962년 영화 ‘동경서 온 사나이’로 배우의 길에 들어선 트위스트 김은 이후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으로 스타 대열에 올랐고, 이후 150여 편에 가까운 작품에 출연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뛰어난 춤솜씨, 재치 있는 말과 행동으로 더욱 인기를 끈 그. 신성일, 김지미 등 미남미녀들이 배우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시대 깡마른 체구에 평범한 외모의 트위스트 김은 그렇게 자기만의 개성으로 30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2002년에는 송승헌 생부 논란, 2005년 성인 사이트 무단 도용 논란으로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된 것. 알고 보면 트위스트 김 역시 피해자였던, 억측에 가까운 루머들로 마음고생을 하며 그렇게 암흑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즈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까지 당하며 뇌를 다쳤고 의식을 잃은 채 4년을 투병생활하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여행을 떠났다. 그를 꼭 빼닮은 외아들 준홍 씨는 아버지 트위스트 김을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여리고 사랑이 많은 분”이라고 회상한다.
연예계 큰 별, 고이 잠들다
오랜 배우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가 떠나던 날은 너무도 적막했다. 몇몇 지인들의 전화소리가 간간이 울릴 뿐, 직접 빈소를 찾는 이는 드물었다. 한창 전성기를 보낼 때 가까이 있던 많은 사람들은 트위스트 김이 여러 가지 루머에 시달리고 어려운 일을 겪으며, 병상에서 4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나 둘씩 그를 떠나갔다.
“생전에 아버님과 친하게 지내던 분들이 많았는데, 시간이라는 게 참… 사람 간의 인정을 무색하게 만들더라고요. 다들 바쁜 일이 있어서 못 오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아버님도 그래야 편하게 가실 것 같고….”
트위스트 김은 지난 2006년 행사장에서 행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대리석 바닥에 넘어지며 머리를 다쳤고, 그후로 4년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만 있다가 생을 마감했다. 첫 수술 직후, 잠시 의식이 있었을 때 “내가 왜 여기에 있느냐, 수술 받지 않겠으니 나를 집으로 데려가 달라” 하는 것이 트위스트 김의 마지막 말이었다.
“평상시에도 꾸준히 운동을 해오셨고,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할 만큼 건강하셨던 분이었어요. 그런데 한순간에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 같아요.”
투병생활을 하는 4년 동안 긴박한 순간을 오가기도 여러 번. 그렇게 하루하루 마음 졸이며 가족과 친척들이 번갈아가며 간호를 했다. 또한 사고가 났을 때는 간간이 들어오는 행사 수입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을 시기였기에 병상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족 모두가 경제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가 큰 수술만 네 번 받으셨거든요. 그때마다 수술비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주사나 약값도 비싸고…. 근데 정말 웃기는 게 주사약 같은 것은 돈을 내고 사와야 맞게 해주더라고요. 지금 당장 맞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하면서도 돈을 먼저 내지 않으면 절대로 놔주지 않았어요. 어찌나 서럽고 답답하던지…. 이런 것은 의료보험도 전혀 안 되니 그 큰 금액을 부담하기 위해서는 집을 줄여나가는 수밖에 없었죠.”
주위에서는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조심스레 건네왔지만 준홍 씨와 가족은 한 가닥의 희망을 붙잡고 오랜 시간 트위스트 김을 지켜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오히려 아버지를 힘들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하면서 준홍 씨는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무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배우
1960년대는 ‘트위스트 김의 시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출연한 영화만도 150여 편에 달했다. 준홍 씨는 “아버지는 그 시절을 많이 그리워하신 것 같다”며 말문을 뗐다. 트위스트 김은 생전 가족에게 ‘맨발의 청춘’에 출연하게 된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신성일과 엄앵란은 일찍이 남녀 주인공으로 낙점되어 있었고, 트위스트 춤을 추는 감초 역할의 캐스팅이 난항을 겪고 있었다고. 그때 마침 김기덕 감독이 트위스트 김이 단역으로 출연했던 작품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그에게 관심을 표한 것이다.
“감독님이 직접 집으로 전화를 거셨는데, 아버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으셨던 거죠. 사기를 치거나 거짓말이겠거니 생각하고 찾아가시지 않았대요. 결국 감독님이 직접 아버지를 찾아오셨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캐스팅이 되었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 트위스트 김은 이 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남부군’, ‘잃어버린 태양’ 등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이후 더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저한테 항상 이야기하신 게 하나 있어요. ‘못생겨도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만 하면 된다’라는 말이죠. 제가 봤을 때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하지 않았던 것을 많이 시도하신 것 같아요. 이를테면 최초로 청바지를 입고 다니신 것처럼요. 평생 연기만 하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던 아버지는 정말로 ‘배우’라는 이름을 너무도 자랑스러워하셨고, 무대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어요.”
그리운 아버지의 빈자리
인기인을 늘상 따라다니는 루머. 트위스트 김 역시 온갖 억측스러운 루머들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탤런트 송승헌의 생부가 아니냐는 논란과 ‘트위스트 김’이라는 이름이 성인 사이트에 명의가 무단으로 도용된 사건까지 세상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아야만 했던 당시를 회상하는 준홍 씨의 표정에서는 여전히 억울함이 느껴졌다.
“송승헌 씨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도 않아요. 정말 너무 말이 안 되니까…. 어이가 없어서 처음에는 그냥 웃어버렸어요. 송승헌 씨랑 닮은 것 같다는 누군가의 말에 우스갯소리로 대답한 것이 마치 사실인 양 와전된 거죠. 성인 사이트 명의 논란은 법적으로 소송까지 들어갔어요. 사실 아버지는 인터넷을 잘 다루지 못하셨어요. 그런데 그런 사이트를 운영했다고 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거죠.”
억울한 마음에 소송을 했지만 관련 법률은 마땅치 않았다. 사이트 운영자가 외국에 있다는 이유로 잡을 수가 없으니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말만 들어야 했을 뿐이다. 결백의 증인이 되어주던 이들도 권력의 힘에 하나 둘씩 트위스트 김을 외면했고, 그는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려 자살시도까지 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가족에게도 그 시간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시간이었다. 다행히 그의 변호를 맡았던 강지원 변호사의 노력으로 재판은 결국 트위스트 김의 ‘완전 승소’가 아닌 ‘일부 승소’로 끝이 났다.
“아버지가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을 때 가장 좋아하셨던 게 의사가 본인의 말을 너무도 잘 들어준다는 거였어요. 그만큼 아버지의 억울한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었다고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많이 호전됐고, 드라마 섭외도 들어오는 등 재기를 꿈꾸고 계셨는데 사고를 당하게 된 거죠.”
그동안 브라운관이나 영화 속에서 비친 트위스트 김은 항상 재치 있고 독특한 이미지였지만 가정에서는 조금 엄한 아버지에 가까웠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것이 모두 자식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만 당시 아버지 트위스트 김은 준홍 씨에게 어려운 존재였다.
“제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한창 활동하고 계실 때라 얼굴 뵙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와 어린 시절 많은 추억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시면 피곤하니까 거의 주무셨고요. 하지만 조금 길게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때는 저를 데리고 낚시나 사냥을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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