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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 장군, 풍운아 김두한, 그리고 아들 송일국 김을동 의원이 공개한
백야 김좌진 장군, 풍운아 김두한, 그리고 아들 송일국 김을동 의원이 공개한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2.01.1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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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칼바람이 유독 그 기세를 등등하게 했던 지난 연말, 배우로서의 인생을 뒤로 하고 국회의원으로서 의정활동에 여념이 없는 김을동 의원을 만났다.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다는 안부 인사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라며 호탕하게 웃는 웃음이 추위를 잊게 했다. 워낙 오랫동안 브라운관을 통해 익숙하게 접했던 웃음이라 첫 만남의 서먹함은 온데간데없다. 이미 은은한 향이 일품인 커피 한 잔이 놓여 졌음에도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재차 대추차를 내오라 이르는 그이에게 푸근한 정이 느껴진다. 여느 대추차와 달리 진한 맛이 입안에 감돌며 옷깃에 남은 추위마저 씻어버린다. 씹는 맛이 일품인 잣과 대추는 김 의원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를 느끼게 했다.
“이게 겨울이면 제가 직접 만들어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대추차라는거 아닙니까. 어떤 분은 출출할 때 요기도 된다고 그러시더군요
(웃음).”
운명과 같은 배우의 길
배우로서 그이를 떠올리자면 ‘약방의 감초’라는 속담이 연상된다. 흔하지만 한약방에서 없으면 안 되는 약재이기도 하고, 어떤 약과도 궁합이 잘 맞아 빠짐없이 들어가는 모양새가 배우 시절 그이의 모습과 왠지 닮았기 때문이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호탕하고 밝은 역할을 주로 맡았던 그이지만 한편으로 드라마를 볼 때면 아직도 꼭 곁에 휴지통을 준비해야 할 정도로 여린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이가 처음 배우로서 운명을 예감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10대 중학생 시절 연극과 조우한 이후 첫사랑의 열병처럼 빠져들었다는 그이. 그러한 연기 사랑은 평생의 업이 됐다.
“책을 산다고 어머니께 용돈을 받아 그 돈을 모두 연극티켓을 사는데 써버렸어요(웃음). 주말이면 하루 종일 극장에 앉아 공연을 보고 그도 모자라 지방 공연까지 따라다니기도 했고요. 광적인 연극 팬이라고 할까. 공연을 갈 때마다 배우들에게 줄 선물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갈 정도였으니까요. 요즘 일국이에게 산더미처럼 들어오는 선물 꾸러미를 보면 그때 내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연극 반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그이였지만 아버지 김두한 전 의원의 권유로 선택한 것은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였다. 배우로서 누구 못지않은 내공을 자랑하면서도 지금과 같이 정치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그런 이력이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듯싶다. 그러나 어찌됐든 젊은 시절 그이의 운명은 배우였다. 줄곧 연기를 하는 하나의 꿈만으로 살아왔던 그이는 결국 동양방송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후로는 역할을 가리지 않으며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킨 삶이었다. 그런 그이가 배우로서 선후배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연기력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었으니 바로 연기지도였다. 그이 스스로도 연기보다 더 자신이 있었다고 말할 정도다.
“전광렬 씨를 비롯해 유동근, 박상원, 전인화, 이미연 등 지금은 중견 연기자로 활약하고 있는 배우들이 모두 제게 연기지도를 받았습니다. 김을동 사단이라고 까지 불렸을 정도니까요(웃음). 내 성격상 혼나는 후배들을 보면 그냥 못 봐 넘겨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다보니 그렇게 됐죠. 그렇게 배운 후배들이 이제는 연기가 안 되는 젊은 신인들에게 ‘김을동 선배에게 가봐라’고 해서 아직까지도 연락이 오는데,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되네요.”
스스로 배우의 길 개척한 아들
연기지도에 그렇게 자신이 있던 그이에게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아들 송일국이었다. 연기자로 데뷔하기 전까지 미술에 뜻을 뒀던 아들. 재차 원하는 미대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다 못한 그이는 무대미술을 해보라며 연극영화과에 진학을 권했다. 미대에는 번번이 떨어지던 아들이 단 한 번에 합격했을 때 그이는 운명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쟁쟁한 배우들의 연기지도를 했던 그이도 정작 아들을 가르치진 못했다.
“연기자가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워낙 드라마도 안 보던 아이라…. 그런데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던 도중 ‘저 MBC 공채 탤런트에 합격했어요’라고 뜬금없이 놀라게 하더군요. 그런데 연기를 하는 것을 보니까 처음에는 기가 막혀서…. 걱정부터 앞서더라고요. 엄마가 명색이 배우인데 망신당하면 안 된다 싶어서 대본을 가지고 연습을 시켰는데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답답한 마음에 언성이 높아지더라고요. 후배들에게도 단 한 번 화낸 적이 없는데 나중에는 대본까지 던져버렸으니, 그 다음부터는 얘가 좀 가르쳐 보려하면 피하더라고요(웃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했던가. 노련한 연기 선생이었던 그이 또한 아들을 가르치는 것은 감정이 앞섰던 셈이다. 결국 그 뒤로 송일국은 현장에서 스스로 부딪히며 연기력을 쌓았다고 한다. 그런 아들을 그이는 철저히 ‘노력형 배우’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직도 잘한 부분 보다는 못한 부분이 눈에 띄는 것이 어머니의 솔직한 심정이다. “아직도 할 말이 많지만 좀 이야기할라 치면 손사래부터 치며 말을 막는다”며 웃는 그이. 하지만 배우로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아들을 볼 때면 흐뭇한 마음이다. 언젠가 부터는 배우 김을동이라는 호칭 대신 ‘송일국의 어머니’라 불리면서 그이에게 아들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연기자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했기에 어머니와 연관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아들. 그 마음을 알기에 애써 말을 아껴왔던 그이다. 그래도 조금은 서운함이 없지 않았던 듯, 슬며시 미소 짓던 그이가 얄미웠던(?) 아들과의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일국이는 저한테 일종의 알레르기가 있어요. 오늘날까지 저하고 토크쇼 한 번을 같이 나간 적이 없을 정도죠. 지난번에는 국회에서 일국이에게 상을 준다고 했는데 전화가 와서 저한테 오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간다고 했더니 그러면 자기는 안가겠다고 하더군요
(웃음).”
배우와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항상 장군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마음에 담고 살았던 어머니를 봐온 탓일까. 송일국 역시 그런 어머니를 본받아 장군의 후손임을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아들을 보면 더 없이 대견하기만 하다.
“얘가 항상 그런 생각을 해요. 배우들 보면 조금만 유명해지면 수입차를 타고 다니는데 국산차를 고집하고 있죠. 어느 날 저한테 ‘어머니 우리나라 차가 세계적인 차인데 장군의 후손이 출세했다고 외국차 타면 되겠습니까’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어디 가면 너무 괄시를 받아서 민망할 때도 있다고 합디다(웃음).”
송일국은 어머니가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진행하고 있는 민족 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동참하고 있다. 과거 김좌진 장군의 기념관을 건립할 때는 드라마 〈주몽〉 연장 방송을 하게 되며 받은 출연료를 모두 내밀기도 했다.
“아무리 바빠도 학생들을 데리고 떠나는 청산리 대장정은 꼭 챙겨요. 학생들도 본인이 스스로 뽑더군요. 논문을 제출하게 해서 일일이 검토해서 선정하고, 모든 것을 총괄 관장을 해서 학생들을 데리고 가죠. 학생들을 위한 우비나 모든 물품을 다 자기가 챙기는 것을 보면 여간 대견하고 고마운 게 아니에요.”
한편으로 이제 가정을 이룬지도 몇 해가 지난 아들이기에 은근히 손주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다. 하지만 무뚝뚝한 아들은 고사하고 부산에서 판사로 근무하는 며느리가 일하는 모습을 보며 선뜻 물어보기도 쉽지 않다.
“그동안 판사라는 직업이 쉬운 줄 알았더니 새벽 2~3시까지 법조문을 다 읽더라고요. 남의 인생을 좌우하는 거라 한 번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알았어요. 저렇게 힘들구나. 거의 아들이 외조하고 있죠(웃음). 그래도 올해에는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아요. 아들 부부를 보면 참 반듯하게 결혼생활을 하는 게 대견해요. 서로 존대를 하거든요. 반말을 하기 시작하면 혹시 기분이 상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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