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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을 맞는 명사 3인의 추억 에세이 1 - 소설가 이순원
스승의 날을 맞는 명사 3인의 추억 에세이 1 - 소설가 이순원
  • 박소이 기자
  • 승인 2017.04.29 0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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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빛나는 1%를 믿어준 스승’
▲ 소설가 이순원.

 

 

소설가 이순원의 스승의날 추억 에세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작가의 자양분이 되어주신 ‘희망등’ 선생님”

 

[Queen 2003년 5월호] 사람들은 내가 글을 쓴다고 하면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 무엇이 반짝반짝 빛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 역시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다.  저 친구는 아마 어린시절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구석이 많았을 거라고.

그러나 겸손의 말이 아니라 나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백일장 같은 곳에 나가 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엔 초등학교 시절대로 그랬고 중학교 시절엔 중학교 시절대로 그랬다. 나는 언제나 그런 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던 평범하고도 평범한 소년이었다. 한 학년이 50명 한 반뿐인 시골 초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그들 가운데 특별히 빛나는 구석을 보여주지 못했다.

내 앞에는 늘 공부로도 글짓기로도 앞선 친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시나 군대회에 나갈 교내 대표를 뽑는 교내 백일장에서조차 나는 단 한번도 장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나와 가장 가까운 40년지기인 부산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는 그 친구가 공부에서든 글짓기에서든 늘 내 앞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시골초등학교의 작은 교내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어쩌다 큰 대회에 나가서도 번번이 떨어지기만 하는 나를 믿어주는 한 선생님이 계셨다.

▲ 스승 권영각 선생님과 함께한 사진.


권영각선생님.

지금은 강릉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는 분이다. 나에게만 특별한 인상으로 남는 분이 아니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그 선생님 얘기를 한다.

7∼년 전쯤부터 초등학교 동창들을 두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 50명쯤의 졸업생 중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스무 명 정도이며 그 중 열다섯 명쯤이 홀수달 마지막 토요일에 서울 시내의 한 작은 음식점에서 만나는 것이다. 멀리서는 부산에서도 오고 울산과 광주에서도 오고 때로는 강릉의 친구들도 합류한다.

서로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은 다음 꼭 빠지지 않는 얘기가 권영각선생님에 대한 얘기다.  어느 학교로 전근을 가셨느냐 혹은 그 선생님은 건강하시냐 묻고 또 묻게 되는 우리 마음속의 은사님이 계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마을에 그때 나이로 스물다섯 살쯤 된 새신랑 선생님이 전근을오셨다.  다른 선생님들은 강릉에서 자전거로 통근하셨지만 이 선생님은 전근을 오신 지 한달 만에 학교 옆에 방 한칸을 얻어 사모님과 함께 들어오셨다.

강릉 시내에서 시골학교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낙후된 벽촌에서 공부로도 미래의 꿈에 대해서도 도시 아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에서 공부하는 우리들을 위해 일부러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 들어와 신혼살림을 차리신 것이었다. 우리는 그 뜻을 그때는 몰랐다.

지금도 우리 시골 동창들은 그 선생님을 ‘희망등 선생님’ 이라고 부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 들어오셔서 저녁마다 등잔이나 남포를 켜놓고 우리의 처진 학습지도를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를 시험 봐서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선생님께서 우리의 밤공부를 위해 일부러 시골에 들어오신 것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우리에게 준 것은 자신감이었다.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앞으로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디 나가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칠 자신감을 어린
가슴 가슴마다에 심어 주셨던 것이다.

얼마 전 동창회를 했을 때 한 여자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때 희망등 선생님이 사모님과 함께 학교 옆에 들어와 사시는 모습을 보고 나도 이 다음 꼭 저렇게 좋은 모습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모님과 사시는 모습으로도 어린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희망등 선생님이셨던 것이다.

교내백일장에서는 물론 군대회같이 큰 백일장에 나가서도 매번 떨어졌던 나는 참으로 큰 낙담을 했었다. 아직 어린 마음인데도 공부로도 무엇으로도 내 미래에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그때 그 선생님은 나를 학교 운동장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앉혀 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봄에 나무에서 꽃이 피지.”
“예.”
“같은 나무에도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나중에 피는 꽃이 있지.”
“예.”
“그럼 어떤 꽃에서 열매를 맺을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같은 나무에서도 일찍 피는 꽃이 더 눈길을 끌지. 그렇지만 선생님이 이제까지 보기에 제일 먼저 핀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큰 열매를 맺는 꽃들은 늘 더 많은 준비를 하고 뒤에 피는 거란다. 나는 네가 일찍 피는 꽃이 아니라 이 다음에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나 뭔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은 큰 열매를 맺기 위해서 많은 책을 읽으라고 하셨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닥치는 대로 집과 학교에 있는 책을 읽었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당시 ‘삼중당’에서 나온 ‘한국문학대계’ 열두 권짜리 두꺼운 책들을 다 읽어냈던 것이다. ‘삼국지’도 초등학교 시절 열 번도 더 넘게 읽었다.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 그것이 내 작가 생활의 가장 큰 자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저마다 방법이 달랐지만 우리 친구들 모두 그 ‘희망등선생님’에게 그런 사연 하나씩 가지고 있다. 매년 5월이면 늘 꽃그늘 아래 그 선생님 생각이 난다.

멀리 떨어져 살아 자주 찾아뵙지는 못해도 우리들 마음안에 그 선생님은 지금도 환하게 희망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뵈었을 때 선생님은 훌륭한 제자들을 두고 있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하셨지만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마음속에 두고 있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Queen 신규섭 기자] [Queen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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