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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지 않고서야> 중년 판 미생, ‘낀’ 497세대 이야기
<미치지 않고서야> 중년 판 미생, ‘낀’ 497세대 이야기
  • 김공숙
  • 승인 2021.12.1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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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평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MBC)가 종영했다. 좀비와 괴물이 난무하는 요즘 분위기에서 소위 ‘뜨는’ 소재는 다 피해간 희귀 작이다. 전자회사 배경, 주인공은 중년직장인 기술자, 주요 소재는 해고와 퇴사, 촬영지는 창원시 전자산업 관련 장소… 어느 것 하나 매력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직장 드라마라면서 제목은 뜬금없이 <미치지 않고서야>다!

그런데 반전이다. 드라마왕국이라는 명성이 무색해진 채널에서, 핫한 꽃미남 꽃미녀도 등장하지 않는데, 소리 소문 없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오랜만의 무공해 직딩 드라마, 중년 판 미생으로 불리며 잔잔한 화제 속에서 마지막 회차에는 최고 시청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필자가 이 드라마를 알게 된 계기는 재미있게도 ‘정재영 노화’, ‘정재영 암’이라는 연관 검색어였다. 실제 드라마를 보니 진짜 폭삭 나이 들어 보이는 배우 정재영이 꾀죄죄한 아저씨 체크남방에 무릎 나온 청바지 차림으로 엔지니어 최반석이라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었다. 한명전자 생활가전사업부 22년차인 44세의 개발자 최반석 수석님은 옷차림뿐만 아니라 “별꼴이야, 진짜!”, “오만정 다 떨어지네요.” 등 무척 구수하게(?) 들리는 친근한 아저씨 대사를 남발한다.

최반석 외 주요 인물들은 모두 1970년대 생, 90년대 학번, 40대 나이의 이른 바 386세대와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 ‘낀’ 497세대다.

최반석과 창인공전 선후배 노병국(안내상) 공정필(박성근) 팽수곤(박원상) 등 아저씨 F4는 팀원들이 함께 밥 먹기를 싫어하자 구내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먹거나, 학벌 좋은 눈치 없는 후배들에게 큰소리도 못 치고 자기들끼리 모여 구시렁댄다. 인사팀장 당자영(문소리)은 1979년생 43세다.

소설 「1979년생 김지영」 처럼 식구를 부양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야 하는 팀장급 여성이다. 자영은 서울 본사에서 지방 사업부로 발령을 받아도, 인사팀장을 맡아 구조조정 ‘칼잡이’로 떠밀려 잔인하고 힘든 악역을 잘 해내고도, 결국 ‘꼬리 자르기’를 당한다. 하지만 별 꼴을 당해도 끝까지, 시쳇말로 존버(끈질기게 버틴다는 뜻의 비속어) 정신으로 버틴다. 왜? 먹고 살아야 하니까!

사회학자 김홍중은 497세대를 진정성과 속물성 사이의 낀 세대라고 부른다. 드라마의 최반석은 속물적인 사내 정치 싸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름대로 진정성 있는 직업인으로 열심히 일하며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버틴다. 반면 또 다른 497세대 당자영은 유리천장을 뚫고자 윗세대인 386의 속물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쳐진다. 이 드라마는 냉정한 현실 속에서, 미치지 않고서야 직장생활을 버텨내기가 쉽지 않지만,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 하루를 치열하게 버텨내고, 또 내일도 버텨내기를 기대하는 직장생활 20년차 전후의 우리들의 이야기다.

<미치지 않고서야>는 웃기다가도 짠해진다. 눈물도 난다. 최반석은 퇴사 후 스타트업 반석컴퍼니를 세워 당자영과 보란 듯이 성공을 이뤄낸다. 마지막에 모두 다 해피엔딩이 되는 걸 보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직장인들이 꿈꾸는 게 회사에서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질 때 뻥 차고 나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차근차근 준비해 보란 듯이 나가는 회사원으로 카타르시스를 주고 싶었어요.”(한국일보, 21.8.27) 작가 정도윤의 말이다.

정도윤 작가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소재를 탁월하게 잘 풀어낸다. 전작은 2017년 KBS 연기대상을 받은 <마녀의 법정>이다. 배우 정려원이 마이듬 검사로 나와 여성아동성범죄의 심각함을 들춰내 공감을 얻었다. 이번 신작 <미치지 않고서야>의 내공이 만만치 않았던 이유는 많은 부분 작가의 공력 덕이다.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매력 없어 보였던 중년직장인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는 자극적 소재로 유혹하는 수많은 드라마들 속에서 조용히 빛난다.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하지만 ‘격변의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n년차 직딩들의 치열한 생존기’, 조미료 하나 없지만 드라마 보는 맛을 깊이 느끼게 해주는 <미치지 않고서야>를, 늦었지만 재소환 하는 이유다.


글 김공숙(안동대학교 융합콘텐츠학과 조교수) | 사진 MBC 〈미치지 않고서야〉홈페이지
 

 


김공숙 교수는…
저서로 「멜로드라마 스토리텔링의 비밀」, 「고전은 어떻게
콘텐츠가 되었을까」, 「문화원형과 콘텐츠의 세계」가 있다.
한국방송평론상 수상, 스포츠경향 등 몇몇 일간지에서 방
송비평을 하고 있고, 한국예술교육학회·한국지역문화
학회 이사, 한국방송작가협회 정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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