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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칼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성 칼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이복실
  • 승인 2023.05.0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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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아내(The Wife) 영화 평론회에 참석하였다. 고등학교 선후배 동문과 함께 매월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데, 지난달에는 영화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느 날 저녁에 집으로 전화가 왔다. 남편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전화였다. 부부는 수상 소식에 서로 끌어안고 춤을 추며 기뻐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두 사람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사실은, 결혼 후 남편이 쓴 글은 전부 다 아내가 써준 것이었다. 아내인 조안은 원래 작가 지망생이었다. 처음부터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남편의 작품이 계속 퇴짜를 맞았다. “그럼 내가 한 번 수정해볼게요.”라고 아내는 얼떨결에 말했고 남편은 묵인했다. 그런데 웬걸. 시장의 반응이 좋았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평생 지속되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충격적이다. 왜 아내는 자기 이름으로 글을 낼 생각을 안 했을까? 영화의 배경은 1959년이다. 당시 사회적 상황으로 보아 여성이 작가로 성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대학 동문 작가의 조언이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녀를 좌절시켰다. “여성의 문체를 대중들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여성 작가의 책은 읽히지 않아요.” 읽히는 책을 쓰고 싶었던 조안은 시도조차 안 해보고 사회가 만든 한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도 이런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

한 선배가 딱 잘라서 말했다. “그녀는 바보예요.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낼 시도조차 안 했어요.” 사실 나도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왜 그녀는 용기를 안 냈을까? 책이 안 읽힐까 봐 두려워서. 남편을 사랑해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의 내면과 행동이 복합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다양한 추론이 가능하다. 다른 선배는 아내인 조안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녀는 타협가예요. 현실과 타협한 거예요. 글이 너무 쓰고 싶었고, 자신의 능력을 남편을 통해서 인정받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둘 다 맞는 말이다. 그녀는 여성 작가의 책은 읽히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주저앉아버린 바보이기도 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현실과 타협한 타협가이기도 하다. 마지막에도 그녀는 끝내 진실을 밝히지 않으며, 노벨문학상 작가의 아내로 머무르는 결정을 한다. 한편, 아내의 성과를 자연스럽게 자기 것인 양 행세하는 남편의 당당한 모습도 보기 불편했다.

“나도 이런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정말 좋을까? 아니 그럴 리가. 자조 섞인 역설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거짓 삶을 살아야 했던 남편의 삶도 행복하거나 편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람직한 것은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본인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잘 안 지켜질 때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남편이 도와주었을 거야

이 영화를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의 지인 중 미국 도시계획 분야의 저명한 교수의 부인이 있었다. 한마디로 교수 사모님. 그러나, 그녀는 사모님에 머무르지 않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과 같은 분야이다 보니 항상 그녀를 향해 수군거리는 말이 있다. 그녀가 성과를 이루어낼 때 더 크게 들린다. 그녀가 박사과정에 입학했을 때도,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도, 대학교수에 임용되었을 때도, 주요 저널에 논문이 게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 말은 “남편이 다 써 주었을 거야.” 남편이 도와주어서 공부도 했고, 논문도 썼고, 대학교수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남편과 내가 같은 분야가 아닌 것에 안도했다. 아마 같은 분야라면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필자도 한 번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무원 시절 이야기이다. 대통령 인수위원회에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남편의 인맥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이렇게 말했다. “인맥으로 가는 자리도 아니지만, 따지자면 남편 인맥보다 내 인맥이 더 넓거든요.” 평생 연구실에서 학자로 조용히 살아온 남편의 삶을 모르는 사람들이 뒤에서 떠드는 말은 우리 가족을 다 웃게 했다. 아내가 잘되면 남편 덕분이라는 수군거림은 1950년대 여성 작가의 작품은 읽히지 않는다는 편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안도 만약 본인의 이름으로 책을 내서 성공했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써 주었을 거야.” 정말 진퇴양난이다. 본인의 이름으로 책을 내면 읽히지 않을까 두렵고, 혹 성공하면 남편이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평가절하 해버리는 이중적 잣대.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여성들도 본인의 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싶다.

그러나 조금씩 변하고 있는 세상

금년 3월 초 노르웨이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노르웨이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11명이 서울에 오는데 관저 리셉션에 참석할 수 있느냐는 요청이었다. 노르웨이는 어떤 나라인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수산업으로도 유명하지만, 양성평등을 다른 나라보다도 앞서 실천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무려 20년 전에 기업 여성 이사 40% 할당제를 도입하였다. 여성가족위원회 국회의원들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네. 참석하고 말고요.” 그날 저녁 나의 첫 번째 질문은 “여성 이사 할당제에 대하여 노르웨이 사회 분위기는 어떤가요?”였다. “한국은 여성 할당제도 없지만, 할당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기류가 상당해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내 질문을 들은 노르웨이 여성 국회의원은 갸우뚱하면서 “노르웨이는 할당제에 대하여 부정적이지 않고, 용인하는 분위기”라고 답변했다. 본인의 사례를 예를 들었다. “할당 덕분에 여성들이 일을 시작한 것은 집에 있고 싶어 하는 남성에게도 좋은 일이에요. 나의 경우 남편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무척 좋아해요. 난 반대로 집에서 일하는 것보다 바깥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해요. 서로의 역할 분담이 잘 되어있으니 운이 좋은 편이에요.”

아니 그녀에게는 주부 남편이 있었다. 주부 남편을 당당하게 공개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 부럽고 보기 좋았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 할당제 덕분으로 여성이 경제활동을 하기 시작부터 생겼단다. 여성의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제대로 평가해주니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지구 반대편에서는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도 성 역할 고정관념이 어서 없어져서 남편 주부가 자연스러운 사회, 여성의 일, 아내의 일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사회가 오기를 기대해본다.

글 이복실(전 여성가족부 차관)

 

이복실은…
전 여성가족부 차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서울 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에서 교육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여성으로서 네 번째 행정고시 합격자이다. 30년간 중앙부처에 재직했으며,
2013년 여성가족부가 설립된 이래 최초 여성 차관으로 임명됐다.
저서로는 <여자의자리 엄마의 자리>,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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