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7월 17일,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때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돌아가셨다.
사인은 비브리오 패혈증이었다.
비브리오 패혈증은 균에 오염된 해산물을 날로 먹어서 발생하는 질병이었다.
간밤에 동네 어르신 몇 분과 함께 생선회를 드셨는데 아버지만 발병했다.
생선회를 드신 뒷날 아버지의 다리에 반점이 생겨 동네 약방에서 산 연고를 발라 드렸지만 반점의 번짐이 심각해 택시를 불러 읍내 병원으로 갔다.
아버지의 증세를 본 의사는 얼른 마산의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라고 했다.
엠뷸런스를 타고 병원에 도착할 무렵 이미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의사는 곧 사망진단을 내렸고 주사 한 번 맞지 못한 채로 아버지는 다시 앰뷸런스에 실려 집으로 왔다.
비브리오 패혈증은 그만큼 무서운 질병이었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다니 천붕이었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장례는 치러야 했다.
요즘 같은 장례식장 시설이 드물어서 빈소는 집에 차렸다.
그 무더운 여름날에 장례는 4일장으로 결정되었다.
급하게 장지를 마련하느라 허둥대는 와중에 조문객은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어머니는 평소에 아버지가 친구를 가족보다 더 중하계 여긴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것은 사실로 밝혀졌다.
마당에 차양을 쳤지만 오뉴월 태양의 열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위를 먹은 데다 밀려드는 조문객맞이에 지친 나는 기진맥진했다.
마을 뒷산에 겨우 마련한 장지에서 내 죽마고우 성식과 형문이 돌 투성이의 묫자리를 파느라 구슬땀을 흘린다고 했다.
군 복무중이던 두 친구는 공교롭게도 휴가차 집에 와 있었다.
군인이 휴가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 황금같은 시간을 친구 아버지의 무덤을 파는데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마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발인 날 상여가 장지로 가기 전에 가게 앞에서 노제를 지냈다.
그때 아주 인상 깊은 일이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십여 명 모여서 미리 써온 조사를 낭독했는데 시골의 영감님들이 쓴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구절절 명문이었다.
특히 "상수야 네가 가면 우리는 이제 어디서 너의 노래 '물새야 왜우느냐' 를 들을 수 있겠니" 라는 대목에서 나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장례를 마치고 나는 한동안 앓아누웠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내 아버지보다 한 달 먼저 아버지를 여윈 영길 형님이 본인이 복용하던 신경안정제를 먹어보라고 주었다.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께 돈을 빌려준 것이 있다는 사람들도 꽤 많이 나타나서 부조로 들어온 돈으로 정리를 했는데 다 갚지는 못했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어머니께 했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는 마치게 하겠다고 했다.
알짜배기 재산이었던 읍내의 싸전은 넘긴 지 오래고, 논 한 마지기 밭 한 뙈기도 없이 재료 값만 해도 수월찮은 대학의 사진 공부를 종일 과자 몇 봉지 팔리는 것이 전부인 시골 가게 운영으로 계속하기는 힘들었다.
어머니는 가게를 보면서 돼지를 사육하고 다섯 마지기 논도 소작했다.
인근 마을로 시집간 누나 내외와 가려리에서 평생 독신으로 산 벙어리 김남도씨가 농사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도왔는지 암퇘지는 새끼를 한 번에 스무 마리씩이나 낳았고 논농사도 잘되었다.
밤새 새끼를 낳는 어미돼지 옆에서 새끼를 받던 기억이 새롭다.
새끼가 갓 태어나면 펜치로 이빨을 잘라주어야 했다.
뾰족한 이빨로 어미젖을 깨물면 어미가 젖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나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