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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공대에 합격한 원호성 학생의 유학 성공기
버지니아 공대에 합격한 원호성 학생의 유학 성공기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8.01 1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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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공대(Virginia Tech)에 합격한 원호성 학생의 유학 성공기

만화를 통해 재미로 시작한 영어

 

나는 영어 알파벳을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어를 몇 년 공부했느냐는 질문은 더더욱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학원에서 영어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에 대한 열정은 나의 아버지께서 근무하셨던 미군 공군 기지에서 시작됐던 것 같다. 당시 군인 가족들도 미군 부대 내 입장이 가능했기 때문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미군 부대 안에는 Wal-mart(월마트) 같은 것도 있고 영화관, 학교, 도서관, 음식점 등이 마치 실제 미국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단, 미군 부대는 흥미만 돋워 주었을 뿐 정작 영어는 이상하게 배웠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항상 텔레비전을 켜고 카툰-네트워크를 시청하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당시 카툰-네트워크는 한글 자막이 달려 있는 대신 영어로 방송을 하였는데, 이 채널을 매우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생 때 약 3년간 반복되는 영어 프로그램들만 보았으니, 웬만한 문장은 모두 기억했다. 후에 영어 학원을 다닐 때에도 영작을 하라고 하면 그때 익힌 문장들을 살짝 바꿔서 쓰기만 하면 되니 문제가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5학년까지는 카툰-네트워크를 보다가 후에 디스커버리로 바꾸었고, 내가 중1이 되고부터는 CNN을 보기 시작했다. 누가 하라고 시킨 것이 아니 라 그냥 재미로 보기 시작한 것들이었다. 이쯤 되면 영어 듣기에는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이미 영어에 '귀가 뚫렸던' 것이다. 좋아하는 취미만 꾸준히 하다가 얼떨결에 영어를 배운 셈이다.

꿈도 꾸지 않았던 유학을 떠난 이유

사실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부쩍 관심이 많았고 흥미도 강하게 보였으나, 정작 중학교에 들어서자 내가 생각한 미래 진로는 다름 아닌 노어(露語)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일반 고등학교를 가기에는 살짝 아쉬움이 있어 주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수원 외국어 고등학교 노어과에 지원하였으나 2차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대로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나와 다른 친구들처럼 한국 대학 진학을 놓고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뻔했다. 하지만 어느 날 공군 자녀 해외유학 협력 업체인 드림아이에듀에서 실시하는 영어 시험 테스트를 오산 K-55 미공군 기지에서 보게 되었다.
그 후로 부모님께서는 유학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셨다. 어머니께서는 이대로는 일반 고등학교에 가기 아깝다며 유학을 권하셨고, 나는 이전에는 절대 꿈도 못 꾸었던 제안에 흔쾌히 공감하고,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미국 유학을 떠나 한국인 동생을 얻다

내 첫 번째 유학은 고1 때 미국의 Dover, New Hampshire였다. 이때는 J-1 비자로 공립 고등학교에 갔는데, 수많은 아이들 중 나를 골랐던 미국 호스트 가족의 사연이 독특하다. 이 가족은 두 부모가 모두 30대로 젊은 부부였는데, 이들에게는 다섯 살짜리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이 아이는 다름 아닌 한국인 입양아였던 것. 나는 곧바로 이 가족이 나를 고른 이유가 입양한 아들을 위해 진짜 한국인 형을 소개해 주고 싶어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영어를 배우려고 온 것인데 얼떨결에 한국인 동생을 얻고 한국에 대해서 가르쳐 줘야 하니 아이러니하였다.
그렇게 첫 번째 유학 때는 미국이라는 땅에 처음으로 적응하고, 문화를 받아들이며 나의 새로운 동생과 친분을 쌓았다. 나는 이 가족과 내 일생 미래를 함께해야 한다는 운명을 쉽게 받아들였다. 내 대부분의 대학 지원서 에세이는 이때의 호스트 부모와 의 대화록과 가르침, 그리고 동생과의 기억들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립심 배워

첫 번째 공립학교 교환이 끝난 후, 나는 사립 고등학교인 미주리에 있는 Rockhurst High School로 전학을 하였다. 캔자스시티에 있는 학교로, 첫 번째 유학 때와는 달리 열악한 호스트 가족 관계를 유지했으나 미국에 온 이상, 힘들다 해도 대신 해결해줄 사람은 없다는 생각으로 아무리 불리하고 불통인 경우라 해도 스스로 해결하거나 참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한때는 소포를 미국으로 잘못 보냈다가 큰 일이 발생해 우선은 드림아이에듀에 통보를 한 뒤, 나 스스로 모두 해결하겠다고 하고 미 정부에 편지와 이메일을 수십 차례 보냈었다.
마음속으로는 호스트 가족에게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으나, 내가 벌인 일인 만큼 직접 해결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결국은 미 정부와 더 큰 문제 없이 결론지을 수가 있었다.

수많은 클럽 활동으로 경험 쌓아

내가 대학을 지원할 때까지는 11학년과 12학년 동안 모두 Rockhurst High School에 머물렀다. 12학년 때는 11학년의 호스트 가족과의 어려움 때문에 다른 호스트 가족과 지냈고 원만한 친분을 유지하였다. 학교에서도 Juggling Club, Math Team, Model UN, Young Republican Club, Human Dignity Club, Science Club, Run on Sentence Translation Group 등 수많은 클럽 활동에 동참하여 경험을 쌓았다.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다양하게 참여하였고, 그 결과 다양한 친구들과 친분을 더 높이 쌓았다. 후에는 대표로 교내 학예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기도 하였다.
12학년의 대학 진학의 시기가 되자 미 해군 사관학교에 다니는 호스트 가족의 딸이 대학 진로 선택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은행에서 일하는 호스트 아버지의 지도로 은행 업무와 비즈니스에 관해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게 되면서 굳이 내가 추구하는 분야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쪽으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존중과 예를 갖추면 관계의 문제는 해결

나는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도 결코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들도 인간이다. 단지 다른 문화를 가진 인간이기에, 항상 존중하고 예를 갖추어 대하면 인간관계는 해결되기 마련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 나는 그 원칙을 미국에서 강력하게 지켰다.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 친구들과 어울렸고, 미국인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군인들과 소방관들을 존경하며 국기에 대한 경례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문화적으로 다 른 실수를 하면 '한국의 문화에서는 이렇게 한다'라는 변명 대신 '미안하다, 고치겠다'고 하였다.
미국 생활에 대한 후회는 없다.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수많은 이들과 정(情)을 쌓았으며, 관계를 넓혔다. 나와 삶을 영원히 같이할 가족을 얻었고, 동고동락을 함께할 친구들을 얻었으며, 무엇보다 정중관천을 벗어나 견문을 넓힌 것이 큰 쾌거였다. 나에게 이러한 고귀한 도전의 열정과 기회를 준 나의 부모님 존체에 건승을 앙망하며, 이러한 도전 기회에 큰 도움을 준 드림아이에듀 대표님과 모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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