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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 최태지& 발레리나 최리나
국립발레단 명예예술감독 최태지& 발레리나 최리나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7.04 0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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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감동을 전하는 모녀

 
두 명의 아름다운 발레리나가 잠시 무대를 내려와 오후의 햇살 속에 섰다. 발레복과 토슈즈 대신 산뜻한 외출복과 플랫슈즈로 갈아 신고 구름 위를 걷듯 공원 산책에 나선다. 알알이 쏟아지는 분수의 물줄기처럼 시원한 미소는 초여름의 더위를 식혀준다. 예술과 삶이 다르지 않듯이, 그녀들이 서는 곳이 무대가 된다.

취재 김수석 | 사진 권오경 | 촬영협찬 헤어&메이크업 이경민 포레

발레의 불모지가 세계 발레계의 주목을 받기까지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일면을 담당한 것이 국립발레단 최태지 명예예술감독과 그이의 첫째 딸인 발레리나 최리나 씨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발레리나 모녀와 함께 오후의 산책길에 올랐다.

최태지 : 발레 대중화의 주역

최태지 명예예술감독은 평생을 발레와 함께해온 여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프랑스와 미국에서 발레 유학을 마친 최 단장은 재일교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가 되었다. 아이 둘을 낳고 몸무게가 80kg이 넘는 아줌마의 몸으로 화려한 복귀에 성공한 유일한 발레리나이며 36세의 나이로 국립발레단장이 된 유례없는 인사의 주인공이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신 부모님께서는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셨죠. 한국에 와서 언어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한국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으로 이겨낼 수 있었어요.”
최 명예예술감독이 국립발레단을 맡고부터(2008.1~2013.12) 한국 발레의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발레의 공연 횟수가 급격히 늘었으며, 공연장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소외지역에서 발레공연이 열렸다. 발레공연에 해설을 곁들어 발레에 문외한인 아이나 노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기존 발레의 정형성을 깨고 국악이나 다른 예술 장르와의 접목을 꾀했다.
“순수예술은 서민들을 위한 예술이어야 해요. 돈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 춤추는 게 순수예술이 아니지요. 외진 시골에서 노부부가 손을 잡고 공연을 보러오기도 하고, 지적장애가 있는 장애우분들이 푹 빠져서 공연을 보시기도 하죠. 순수예술의 힘은 시대와 계층을 초월하는 거예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예술이 되어야 해요.”
국내 발레의 대중화를 이끈 최 명예예술감독은 어릴 때부터 발레교육을 하여 18살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한다. 발레는 음악에 대한 이해와 연기력과 예술적 감각이 모두 필요한 종합예술이므로 이를 통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학교의 설립은 필수라는 것이다.
“사교육비 부담 없이 마음껏 재능을 펼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학교의 설립은 꼭 필요해요. 국립발레단이 있는 나라 중에 발레학교가 없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이에요. 입시나 경쟁이 아닌 예술 그 자체의 기쁨을 찾아주는 학교가 필요합니다.”

 
 






















최리나 : 세계적인 발레단의 프리마

최태지 단장의 딸인 최리나 씨는 러시아의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에서 무용수로 있다가 학업을 마치기 위해 2010년에 발레단을 나왔다. ‘현대 발레의 거장’으로 불리는 에이프만이 이끄는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에서 프리마로 활동한 건 최리나 씨가 한국인 최초다. 최리나 씨에게 있어 발레는 숨 쉬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발레리나인 엄마의 영향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발레 영상을 보고 발레 음악을 들었다. 걸음마를 떼고 나서는 엄마를 따라 발레 공연을 보러 다녔다.
“제 이름의 ‘리나’는 ‘발레리나’에서 따온 거예요. 태명부터 ‘리나’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발레 말고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장래희망을 써야 하면 항상 발레리나라고 썼으니까요.”
최리나 씨에겐 발레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있었지만, 발레리나로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최태지의 딸’이라는 것은 큰 부담이었을 뿐더러, 그녀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는 데에도 걸림돌이 되었다. 게다가 큰 키로 인해 국내 발레단원 중에서는 그녀의 상대역을 찾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고3 때는 발등에 스트레스성 골절이 와 1년 반 동안 발레를 완전히 중단해야 했다. 하지만 발레를 향한 그녀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부상이 나은 뒤 키가 큰 단원을 선호하는 러시아의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 오디션에 합격했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지옥 같은 1년간의 트레이닝을 견딘 끝에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는 발레리나로 거듭날 수 있었다.
“저에게는 항상 ‘최태지의 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제 실력을 객관적으로 가늠하기가 어려웠어요. 칭찬도 질타도 ‘최태지의 딸’이니까 받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러시아 사람들은 제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무대에서 제가 보여주는 만큼만 평가를 받을 수 있었어요. 러시아의 관객들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나에게도 재능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최태지&최리나 : 춤으로 교감하는 모녀

최태지 명예예술감독은 예술가이자 행정가로서 최고의 면모를 선보였지만, 두 딸에게 충분한 애정을 주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했다. 최 단장은 열정적인 예술가였던 만큼 두 딸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그녀가 짊어진 짐이 너무나 무거웠다.
“발레단을 이끌어오면서 발레단원을 키우는 것에 열중하다 보니, 막상 우리 아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관심을 주지 못했어요. 예원학교에 진학한 리나가 하루는 전화를 해서 급하게 학교로 오라고 하더군요. 가보니 딸아이가 학교 마당에서 울고 있는 거예요. 그리곤 저에게 ‘엄마, 발레단장 당장 그만둬! 내가 엄마 때문에 왜 힘들어야 해? 그냥 보통 엄마처럼 나 위해서 살아주면 안 돼’ 하면서 엉엉 우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도 콩쿠르 심사가 잡혀 있었어요. 그래서 딸을 가까스로 달래주고 돌아서는데 가슴이 얼마나 찢어졌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잘 커서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는 발레리나가 되어줘서 고맙고 자랑스러워요.”(최태지)
최리나 씨는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잘해도 못해도 늘 남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모두들 ‘발레리나 최리나’가 아닌 ‘최태지의 딸, 최리나’로서만 그녀를 바라봤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엄마가 유명한 발레리나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중학교를 예원학교로 입학하다 보니 엄마의 존재가 고통스럽게 다가올 때가 많았어요. 친구들의 시샘도 있었고, 의도적인 무시도 있었어요. 잘하면 당연한 거고, 못하면 이상한 거였죠. 무엇을 해도 인정받지 못했어요.”(최리나)
그럴수록 최리나 씨는 더 독하게 연습하며 엄마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마침내 최리나 씨를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최고의 발레리나로 키워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짓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제가 엄마와 같은 길을 가면서부터 엄마는 무섭고 인색한 선생님이 되셨어요. 제가 울면 호되게 꾸짖으셨죠. 그러다 러시아로 제가 하는 공연을 보러오셨어요.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려가고도 엄마는 객석을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우시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끝까지 칭찬은 안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냥 집에 가서 따듯한 밥을 지어주셨어요. ‘밥 먹어라. 고생했다’하셨죠.”(최리나)
최리나 씨는 이제는 ‘최태지의 딸’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엄마가 자신의 롤 모델이라는 것이다. 최리나 씨는 엄마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꿈을 가지고 있다.
“엄마는 저를 발레리나로 낳아주셨어요. 엄마는 제가 여자로서 존경할 수 있는 삶의 롤 모델이세요. 제가 결혼해서 딸을 낳게 된다면, 3대가 함께 무대에 서고 싶어요. 그런 상상을 하면 행복해져요.”(최리나)
최태지 명예예술감독은 딸과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근래 들어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다. 품 안의 자식 같았던 딸이 어느덧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최 명예예술감독이 그이의 인생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랑하는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좋은 엄마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으니, 좋은 할머니라도 되어볼 생각이에요. 손자, 손녀 손을 잡고 함께 공원에 산책을 나오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이렇게 일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아이들이 잘 자라주었기 때문이죠. 아이들이 제 힘이에요. 아이들이 있기에 더 모범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최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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