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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의 자연미, “극단의 조화가 빚어낸 충족감”
미국 서부의 자연미, “극단의 조화가 빚어낸 충족감”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9.10 2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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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환의 미국 거꾸로 보기

미국 서부는 독특한 지형과 자연이 어우러져 빚어낸 장엄한 풍경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이다. 잘 가꿔진 꽃밭부터 버려진 사막의 벌판까지 이질적인 자연의 단면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화려함과 황폐함, 부드러움과 거침이 동시에 존재하는 우리 삶의 모습과도 참 많이 닮아 있는 듯했다.

글·사진 박영환(KBS LA특파원)

 
#1 사막의 잡초와 관목,

“극한의 삶을 감내하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져”

110℃가 넘던 날 세계 최대 태양광 발전소 취재를 위해 모하비 사막을 3시간 넘게 달렸다. 태양에서 쏟아지는 열과 도로에서 반사되는 후끈함이 더해져 자동차도 헉헉 거렸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사막 복판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 사우나에 들어선 듯 열기가
온몸을 덮쳐왔다. 작은 바람에도 모래 먼지가 풀풀 날렸다. 바닥은 건조하다 못해 바짝 메말랐다. 참으로 황량하고 척박한 땅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찬찬히 땅바닥을 내려다보니 이곳저곳에 생명의 뿌리를 내린 식물들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일부는 가을이 오지 않았는데도 잎이 누렇게 말라 점차 부스러지고 있었다. 봄철에 꽃을 피운 뒤 서둘러 열매 맺고 생명보존을 위해 묵상에 들어간 잡초들이다. 키 작은 관목들은 메마름 탓인지 엽록소의 색깔이 바래서 누렇다. 언뜻 보면 말라서 죽은 듯 보이지만 다가가 손으로 만져 보고 얼굴에 부비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신비로운 광합성 작용은 현재 진행형이다.
비 한 방울 구경하기 어려운 땅에 선인장도 아닌 잡목들이 어떻게 싹을 틔웠고 뿌리내리고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는지 안쓰럽고 놀라왔다. 색감이 퇴락해 관목 특유의 자태는 무너졌으나 극한의 삶을 감내하는 모습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2 미적 개념의 개벽(開闢),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면 아닌 ‘내적 끌림’에 있다”

태풍에 휩쓸렸건 야생 동물과 새의 털에 실려 왔건 씨앗의 처지에서 종착지 사막은 유배지였을 것이다. 동물과 달리 더 나은 환경을 택해 이동할 수 없는 씨앗에게 메마른 땅은 생과 사를 가르는 전쟁터였을 것이다. 그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고립무원의 터전에서 그 작은 씨앗은 생명을 착근시키기 위해 매일 밤낮으로 싸웠을 것이다. 밤에는 바람과 이슬이 안고 온 습기에, 낮에는 태양 에너지를 받느라 몰입했을 것이다. 하루 30℃가 넘는 일교차까지 덤으로 버텨내야 했을 터이다. 빨아올린 마지막 물 한 방울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 잡초와 관목은 광합성을 멈추지 않았고, 미래의 생명인 씨앗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말라비틀어진 보잘 것 없는 잡목 한 포기에도 우주적 탄생과 순환이 담겨 있다. 물과 바람과 사계절이 풍성한 한국 땅에서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새로운 미적 깨달음의 여파일까. 잘 꾸며진 꽃밭이나 정원보다 사막의 벌판이 아름답고 황홀하게 다가왔다. 장롱속 진주나 다이아몬드 보다 값져 보였다.
내 자신이 갖고 있던 미적 개념에 개벽이 일어났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잘 정돈되고 꾸며진 화려함, 고상한 품격과 가치, 인기나 다름없는 평판 같은 외적 요소가 아니라 생명 본연의 ‘내적인 끌림’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감탄과 경탄은 눈으로 쉽게 다가오지만 끌림은 마음이 충족돼야 비로소 생겨난다.

#3 미(美)의 진화(進化),

“극단적 개체의 조화는 아름다움을 배가시킨다”

 
 
▲ 잘 가꿔진 해바라기 꽃밭부터 황폐한 사막까지, 경계마다 이질적이고 생경한 풍경들이 펼쳐지는 미국 서부에서는 다채로운 자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서부의 사막은 인간들과 만나는 경계마다 색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잘 가꿔진 해바라기 꽃밭과 잡초조차 살 수 없는 산등성이의 살풍경이 만나기도 하고 거친 근육을 가진 돌산과 푸른 잔디가 대비되는 골프장도 많다. 언뜻 보기에 서로 이질적이고 생경한 두 요소가 충돌하지만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오히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미적 상승작용을 일으켜 충족감과 충만감을 느끼게 해준다. 정원의 꽃은 화려함에 생동감을 더하고 잔디의 푸른 엽록소는 푸르다 못해 출렁이는 녹색 바다와 파도를 연상케 한다. 버려진 사막의 들판과 산맥이 인위적으로 디자인된 꽃밭과 만나 미의 기본 요소 중 하나인 질감을 밀도 깊게 만들어 준 덕분이다.
화려함과 황폐함, 부드러움과 거침, 연약함과 근육질감, 생생함과 죽음 같은 무거움, 정돈과 무질서, 안온함과 까칠함 등 이질적 미적 요소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룬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그렇다. 극과 극이 같은 방향으로 가면 치우침이 되지만 적당하게 맞서면 대비적 조화가 된다. 포인트를 집어넣은 집이나 가구, 가전제품, 양복이 생기가 있고 미적 충족감이 살아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4 휘어진 원목으로 지은 한국의 절집,

“대비적 미는 동서양에서 통한다”

서산 개심사의 범종각과 종무사무소가 떠오른다. 정자처럼 생긴 범종각은 휘어진 원목을 그대로 사용해 자연미를 느끼게 한다. 종무 사무소로 쓰는 요사채 건물도 휘어진 나무를 써 재미있고 앙증맞다. 원래 사찰은 발걸음도 조심스럽게 떼야할 만큼 무거운 분위기다. 창살의 문양과 검은 기와의 반복적 무늬는 은연중 질서를 강요하고 침묵과 단정을 요구한다. 구도와 깨달음의 도량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종의 파격이고 파계다.
목재가 부족해서일까, 주지 스님이나 목수의 일탈적 예술성이 투영된 것일까. 곧음과 휘어짐의 대비적 요소가 미의 충만감을 끌어올린 것만은 분명하다. 상호 대비적 요소가 만나 불자들에게 여유와 재미까지 선사했다면 금상첨화다.
모든 도로가 로마로 통하듯 세상의 모든 미적 이해와 감각은 국경을 넘어선다. 미국 서부 자연의 대비적 미적 요소와 한국 전통 사찰에서의 일탈적 디자인은 외양은 다르지만 충족감이라는 차원에서 미적으로 완벽하게 통한다.

#5 대비적 심미안(審美眼),

“잡초와 꽃에게 동시에 아름다움을 느끼다”

여름방학 때 초등학생 아들을 ‘톰 소오여 캠프’에 보냈다. 매일 연못에서 개구리 잡고 진흙탕에서 뒹굴며 놀았는데 한 달 뒤 아이에게 괄목할 변화가 나타났다. 파리나 모기, 개미조차 두려워했던 녀석이 어느 날 달팽이를 직접 잡아서 팔목 위에 올려놓고 슬슬 기어가는 느낌이 너무 좋다며 아빠도 한 번 해보란다.
야생의 것들을 징그럽게 여기고 인간과 멀어야 문명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의 사고가 질적으로 변했다. 아름다움 즉 미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다. 경험을 통해 시야를 넓힐 수 있다. 균형미나 외적 화려함이 다가 아니고 파격이나 거칠고 촌스럽고 소박한 것들도 미의 필수 요소라는 걸 가르치는 건 영어단어 100개를 외우게 하는 일보다 아이들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지 않을까.
추석에 고향에 가거든 도시의 문명과는 대비적인 시골의 진짜 모습을 느끼게 하라. 잡초와 작물이 공생하는 들판으로 나가 세상 모든 생명이 소중하고 아름다움의 원천임을 깨닫게 하자.
인디언들에게는 ‘잡초’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애기다. 잡초는 박멸되거나 천시할 대상이 아니다. 꽃이 잡초를 만나야 더 빛이 난다는 사실만 깨닫게 해줘도 그 아이는 인생을 미술보다 아름답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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