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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수학과 여성 최초 종신교수 오희
예일대 수학과 여성 최초 종신교수 오희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6.27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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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년 이어온 미국 명문대의 전통을 깨다

 
오랜 전통을 깨기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미국 명문 예일대 수학과는 지난 300여 년 동안 여성을 종신교수로 임용한 전례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그 전통을 깬 한국인이 있다. 바로 미국 브라운대 교수와 한국 고등과학원 공동연구 교수를 맡고 있는 오희 교수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서울신문, 고등과학원

오희 교수는 1992년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예일대 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여성 수학자다. 이후 미국 프린스턴대와 캘리포니아공과대, 브라운대 등 세계적인 명문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등 수학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갔다. 이외에도 오 교수의 이력은 화려하다. 이미 2003년 캘리포니아공대 부교수 임용 시절 종신직 교수 자격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수학 안 다학제 분야인 ‘호모지니어스 다이내믹스’에서 성과를 내어 2010년 세계수학자대회, 작년 연례 미 합동 수학자 총회의 기조강연자로 나서는 등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오 교수는 2013년 예일대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오 교수를 수학과 종신직 교수로 임용하겠다며 대학 측이 연락을 취해온 것이다.

의지와 달리 시나브로 향했던 수학자의 길

오 교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수학 분야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암기 과목보다 상대적으로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이 주어지는 수학 공부가 오 교수의 적성에 맞았던 것이다. 특히 광주여고 3학년 시절 수학을 쉽게 느끼게 해준 한 은사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 시기가 없었다면 오 교수가 수학자의 길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 수학이 재미있었어요. 다른 과목은 외워야 하는데 혼자 생각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좋았죠. 광주여고 3학년 때 송현길 선생님이란 분께 수학을 배웠는데, 그때 수학이 쉽게 느껴졌어요. 당시 선생님께서 ‘자, 이런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지’ 하시면 손을 들고 ‘이렇게 해요’라고 해서 같은 반 학생들에게 미움을 받는 학생이기도 했죠.”

▲ 예일대 도서관 전경
▲ 예일대 강의실 모습
어린 시절부터 오 교수가 수학자의 꿈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오 교수는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큰오빠의 권유에 의해 2지망으로 적었던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1지망으로 썼던 의대는 자발적인 희망사항이 아닌, 부모와 담임교수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원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특별히 뭐가 되고 싶은 건 없었어요. 칭찬받으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좋은 엄마가 돼야겠다는 어렴풋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대입 학력고사 당일, 감독 선생님께서 얼굴을 확인하며 말을 시키는 통에 주의가 산만해져 13문제나 틀렸던 기억이 나요.”
오 교수가 수학과를 2지망으로 선택한 이유는 바로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큰오빠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 이야기로는 당시 교수인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수학을 하고 나서 경제학을 하는 것도 괜찮다’는 말에 확신을 얻고 수학과를 선택한 것이다.
“1학년 때 2지망으로 된 수학과를 계속 다녀야 하나 고민했는데, 당시 해부 지도교수였던 김홍종 선생님께서 ‘수학은 아름다운 학문이니 일단 정 하기 싫으면 다른 것을 하는 발판으로 삼아도 좋을 거예요’라고 말씀해 주셔서 수학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1년간 학생운동에 전념하는 등 사회 문제에도 관심

오 교수는 대학 시절 1년간 학업을 중단하고 학생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덕분에 1년간 거의 수업에 참석하지 않아 5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기도 했다. 당시 오 교수는 약자들을 도와주는 삶이 가치 있다고 여겼지만, 1년간 학과 수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수학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져갔다고 기억했다.
“대학을 5년간 다녔어요. 3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죠. 수학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수학만 공부하는 인생은 너무 뻔한 것 같아서 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었어요. 그런 점에서 약자들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하던 때였죠.
총학생회 연대사업부 노동분과장을 맡게 되면서 1년간 거의 수업을 못 들어갔어요. 점점 시간이 지나니까 수학 문제를 푸는 게 그리워지더라고요.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회과학 공부를 하다 보니 사회과학에는 최선과 차선은 있지만 정답이 없었고, 그래서 수학이 그리웠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을 하는 기간 동안 오 교수는 잃은 것도 있었지만, 얻은 것도 적지 않은 듯했다. 사회과학에 심취할수록 역설적으로 수학이 떠올랐고, 수학을 향한 그리움은 스스로 수학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특히 학생운동에서 자주 쓰는 말 중 ‘핵심고리를 잡아라’는 수학 문제의 해결 방법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이는 사람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조건과 배경이 아니라 인간 내면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도 된다.

 
수학 잘하는 비결? 그냥 열심히 하는 것뿐

오 교수가 현재 연구하고 있는 분야는 현대 수학에서 요구하는 분야별 학문적 교류를 통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정수론이나 기하학의 문제들에 대해 동역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분야다. 종신교수직 임명으로 브라운대에서 예일대로 소속을 옮기게 된 오 교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예일대가 박사학위를 받은 모교이기도 하고, 필즈상을 받으신 그레고리 마굴리스 교수가 제 지도교수였어요. 그 분이 제가 오는 것을 원했는데, 그 분의 제자로서 동료로 간다는 것도 영광스러웠고, 또 제가 하고 있는 분야가 마굴리스 교수를 통해 학맥을 잇는다는 의미도 있어요.”
세계가 주목하는 수학자인 만큼 오 교수만의 남다른 수학공부 비법이 있을까. 결론은 “그런 비법은 없다”였지만 모든 일은 요행을 바라기보다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보편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는 발언을 남겼다.
“수학자라고 하면 미국 사람들은 ‘당신 천재군요’라고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 수학 참 못했는데’라고 해요. 어느 나라나 대중은 수학을 멀게 느끼죠. 수학 잘하는 방법을 물어보면 ‘열심히 하는 것’이라는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서점에 가면 공부를 잘하는 법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걸 읽어도 자신에게 적용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가장 뛰어난 수학자들은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에요. 시간을 투자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 방법인데, 그것은 좋아해서 계속 생각을 해야만 가능한 일이죠.”

차별과 편견의 벽을 허물고 오직 실력으로만 종신교수직을 보장받은 오희 교수. 예일대 수학과의 오랜 관습처럼 굳어진 300여 년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힘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수학자로 갖춰야 할 실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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