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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같은 열정으로 스승을 사랑했던 소설가 서영은
폭풍 같은 열정으로 스승을 사랑했던 소설가 서영은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09.29 16: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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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은이 만난 Queen 1

천부적인 재능의 여성 예술가! 소설가 서영은

 
세계적인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이었던 까미유 클로델을 닮은 여인이 한국에도 있다. 소설가 서영은 씨는 1967년에 문단의 거목이자 30년 연상인 김동리 선생을 만나 20년 동안 그의 연인으로 살다가 1987년에 결혼했으나, 3년 후 김동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5년간 간병한 후 사별했고, 전처 자식들과 소송에 휘말리는 등 누구보다 파란 많은 생을 살았다. 까미유 끌로델이 스승의 그늘과 자신의 열정 사이에서 균형을 잃어 정신병원에 들어간 비운의 예술가라면, 서영은 씨는 자신의 사랑과 고통을 단련하여 강하고 낭만적인 영혼의 예술가로 거듭나면서 주옥같은 작품들을 여전히 쏟아내고 있다. 최근 자전적 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를 출간했다. 인터뷰를 위해 그녀가 선택한 장소는 정동 프란체스코 성당 앞 카페 ‘Birds N Bugs’였다.

글 김다은(소설가·추계예술대학교 교수) | 사진 양우영 기자


김다은(이하 김) 카페로 들어서는 모습이 소리 없이 색깔로 스며드는 가을 같다. 할머니라는 호칭을 들을 나이(71세)인데, 어떻게 그런 젊은 분위기를 유지하나?
서영은(이하 서) 작년에 전철의 경로석에서 쫓겨날 뻔했던 적이 있다. 어머니로부터 좋은 뼈를 물려받은 덕에 골다공증이 전혀 없고, 꼿꼿한 자세가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젊은 날 춤을 배워 단련된 부분도 있고…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김 인터뷰하고 싶은 첫 번째 퀸(Queen)이라고 알렸을 때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겉치레가 없는 분이셔서 불편해할 줄 알았는데, 당당하게 퀸임을 인정한 이유는?
서 극심한 삶의 고통을 통해 성숙해진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퀸이다. 운명을 만나본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퀸이다.

김 당신에게 운명은 어떤 의미인가?
서 운명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대개 피동적으로 살면 운명을 만나기도 힘들다. 그래서 운명을 만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지극한 괴로움이나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운명이 아니고, 어떤 상황을 감당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치러낸 뒤 삶의 태(態)가 바뀌는 것이다.

김 당신의 운명에서 김동리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긴 세월 동안 김동리 선생의 연인으로 살다가 두 번째 부인인 손석희 씨가 타계하고 나서 김동리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틀에 매이기 싫어하는 성격으로는 유럽처럼 동거를 택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꼭 결혼해야 했나?
서 결혼하지 않았다면 삶의 몸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몸은 매우 중요하다. 결혼하기 전에는 남자가 오로지 섹스를 위한 몸으로 다가왔지만, 결혼하고 난 후에는 삶 자체가 몸이었다. 결혼하지 않았다면 썩어가는 밀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김 당신의 결혼생활은 썩어가는 과정이었나?
서 당연히 그렇다. 썩어야 한다. 제대로 썩어야 한다. 누에고치 속에서 징그러운 애벌레로 머물러야 나비가 되는 섭리다. 썩어가는 과정에서는 끝도 목적도 알 수 없다. 목적을 둬봤자 소용없고, 어떤 절대적인 섭리 속에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김 결혼생활 속에서 여성들이 무조건 견디라는 뜻인가?
서 썩어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감수하거나 감당하겠다는 의식이 커지면 인격적인 도약이 일어난다. 단순한 인내만이 아니다.

김 인격적인 도약은 어떤 의미인가?
서 수레를 만드는 장인이 제자에게 바퀴나 손잡이나 수레의 부품 하나하나를 가르친다고 훌륭한 제자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제자 스스로 자기 선택 하에서 그 과정을 ‘치러내야’ 제대로 장인이 되어간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어떤 상황에서나 제대로 썩으려면 치러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낼 수 있는 풍요롭고 기름진 존재가 된다. Queen의 왕국은 미모의 왕국도 아니고, 혈연이나 혈통으로 묶이는 왕국도 아니고, 위에 군림하며 사람을 부리는 왕국도 아니다. 자신의 자양분을 토대로 품을 수 있는 ‘품’의 왕국이다.

김 Queen의 품에 너무 품어주면, 마마보이들을 양산하지 않을까?
서 하하, 도리어 어리광을 부릴 수 없는 품이다. 여성이 한 인격체로 성숙해지면 상대방에게도 인격체로 대할 수밖에 없다. 좁은 두 팔 안의 품이 아니다. 제대로 썩으면 다른 국면에 접어들게 되고 세계도 품을 수 있다. 물론 누구나 Queen이 될 수 있다.

 
김 현대 여성들에게 그런 품이 없다고 여겨지는가?
서 그렇다. 내 어머니의 세대에서는 그런 품이 있었다. 학벌이 있거나 없거나 교양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삶을 치러낸 여자들의 거칠 것 없는 당당함이 있었다. 어느 할머니를 봐도 마찬가지다. 척, 서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 왕국의 영향권에 있게 된다. 대지적인 자양분을 느낀다. 한데 현대 여성들은… 우리 사회가 외모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다 보니 성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거나 사회에 진출해서도 과거 남성들이 조직을 이끌며 군림하던 방식을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의 역할을 재정립할 시기다. 제3의 차원, 다시 말해 품을 넓혀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성의 상대적인 여성성이나 희생적인 모성이 아니라, 삶의 성숙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넓혀 가는 피스메이커(Peacemaker)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비법을 알려 달라. 가령, 최근 <꽃들은 어디로 갔나>라는 당신의 자전적 소설을 읽어 보면, 전처 자식이 “너는 아버지의 요강일 뿐”이라고 모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같이 수치스럽고 모멸적인 삶의 순간들을 공개하고도 담담할 수 있는 비법은 무엇인가?
서 지금 우리가 차를 마시고 있는 카페 이름이 새와 벌레(Birds N Bugs)이다.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순간은 얼마나 맛있겠는가. 맛있는 곳을 세련되게 표현한 카페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벌레의 입장에서는 잡아먹히는 것이다. 먹힌다! 먹혀 준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사람관계에서 먹혀 주겠다는 자세를 견지해 보면 안다. 먹혀 주겠다는 것은 이미 결핍을 넘어서서 주변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강자처럼 보이고자 하는 자는 결핍 때문에 그렇다.

(서영은 씨는 카페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보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김 밖의 비를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는가?
서 그렇다. 빗방울이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순간을 자세히 보라. 소설가 최정희 씨의 글 속에 “창포 잎 내릴 비는 오직 하나”라는 표현이 있다. 하늘에서 내린 물방물이 그 잎 위에만 떨어지는 순간! 인연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표현이다. 하늘의 새와 땅의 벌레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오로지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순간이다.

김 Queen의 왕국은 자신의 영향력을 중심으로 닫힌 공간은 아닌가?
서 문학에서는 이상(李箱)과 함께 ‘방’이 등장하면서, 영웅도 큰 서사도 사라져 갔다. 마찬가지로 현대 삶에서도 인간들이 ‘방’ 안에서만 고뇌하고 생활한다. 흔히 방을 벗어난다고 해서 캠핑을 가는데, 방의 연장선일 뿐이다. 방 안에는 모험이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 같은 생활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틀에 갇히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삶에서나 세계에서나 계속 모험해야 한다.

김 여성이 피스메이커가 되기 위해서는, 특히 직장 여성들은 어떤 자세여야 하는가?
서 우선 공의(公義)가 있어야한다. 즉 그 공동체를 위해 공평하고 도움이 되는 결정이나 행동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의 이익이나 욕망만을 앞세우지 않게 된다. 공의를 지니면 아랫사람의 장점도 키워 주게 되고,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되돌아올 것이다.
가족은 서로에게 이유 없는 습관을 만들어 가는 존재

김 당신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
서 산책하다가 우연히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해서 집에 안고 돌아왔다. 이젠 제법 자라서 '미미'가 낮에는 집밖을 쏘다니며 친구들을 만나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면 목이 마른지 물을 달라고 보챈다. 물그릇에 담아 주어도 소용없다. 내가 세수하던 중간에라도 두 손에 물을 담아 입에 대어 주어야 먹는다. 가족은 서로에게 이유 없는 습관을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김 1983년 이상 문학상을 탄 <먼 그대> 속의 여주인공과 30년이 지나 쓴 <꽃들은 어디로 갔나> 여주인공에 사랑의 차이가 있는가.
서 내 작품 속에는 연금(鍊金)이 반복되고 있다. 상대방이 어떤 가치를 지녔건, 어떤 상태이건 상관이 없다. 자기 앞에 오는 사람과 상황에 부딪혀 보는 것이다. 대개는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상처를 통해 상황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의 깊이도 깊어진다. 상대방이 어떤 차원에 속해 있건 내 쪽에서 변화를 시도해서 상대방을 바꾸어 나가며 나 또한 변화되는 것이 내 연금의 방법이다.

김 최근 출간한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돈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 그리고 <꽃들은 어디로 갔나>까지 기독교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서 하나님 안에 사니까 그런 책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특히 <꽃들은 어디로 갔나>는 소설이지만, 나를 찢으면서 썼다. 소설 속에서 잘난 척 포장해 봤자 가짜 삶이다. 그런 삶을 살면 더욱 외롭고 스스로 고립된다.

김 <돈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에서 돈키호테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괴짜 기사가 아니다. 심지어 당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서 원작가가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렇지, 그는 성경적 인물이고 성경의 열세 번째 사도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이란 이 땅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땅에 육화되어 내려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자신의 삶에 부딪히고 제대로 썩은 후 마침내 날게 되면, 삶은 누구에게나 위대한 것이다.

 
김 자주 여행을 떠나시는데, 재미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달라.
서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산골의 카페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는데, 아주 정중하게 "Would you like to give me a cup of coffee?"하고 말했더니 못 알아들었다. "커피! 커피!"라고 소리쳐도 통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배운 스페인어로 "까페! 까페!"하니까, 드디어 커피를 줬다. 나와 동행했던 치타(애칭)는 시골 촌부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내가 그렇게 어려운 영어를 사용한데 대해 핀잔을 많이 줬다. 하하하.

김 당신은 자주 웃는다. 최근에 가장 많이 웃었던 적은?
서 달걀이 밖에서 깨지면 달걀프라이밖에 안 되지만, 스스로 깨면 생명이 된다고 하더라. 하하하.

김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 Queen으로 손색없는 분을 추천하라면?
서 정명화·정경아·정명훈의 어머니인 이원숙 여사를 꼽겠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분이지만, 무엇인가를 키우기 위해 온전히 밑거름이 되신 분이다. 밑거름이라는 표현을 오해 말라. 그분은 딸들과 아들이 세계적인 지휘자나 연주가가 될 수 있도록 진정한 멘토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의 능력을 온전하게 사용하는 그런 자양분,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김 최근 녹내장 때문에 한쪽 시력을 잃었다고 들었다. 두렵지 않은가?
서 전혀.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진 적이 있긴 하다. 육신의 눈보다 영안을 뜨고 제대로 보게 해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내가 할 일이 많다고 여기시는 모양이다.

(막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무 잎들이 비와 함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작가 김다은은…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이화여대 불어교육과와 동 대학원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파리 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제3회 국민문학상에 장편소설 '당신을 닮은 나라'가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및 창작집 '금지된 정원' '쥐식인 블루스' '모반의 연애편지' '훈민정음의 비밀' '이상한 연애편지' '러브버그' '위험한 상상' '푸른 노트 속의 여자'와 문화칼럼집 '발칙한 신조어와 문화현상'을 출간했으며, 서간집 '작가들의 연애편지' '작가들의 우정편지' '작가들의 여행편지' '해에게서 사람에게'를 엮어냈다. 프랑스어 소설 'Imagination dangereuse' 'Madame'을 발표했으며, 번역서 '다른 곶' '에쁘롱' '모데르니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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