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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표창받은 김태욱의 ‘가족(家族)가 정신’
대통령 표창받은 김태욱의 ‘가족(家族)가 정신’
  • 박천국 기자
  • 승인 2014.06.28 2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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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시라 남편’에서 성공한 기업가가 되기까지

 
1990년대 가수로 활동했던 김태욱 대표는 배우 채시라와 결혼 이후 돌연 기업가로 변신했다. 당시 그는 ‘채시라의 남자’로 주목받았지만, 웨딩업체를 설립한 후에는 기업가로서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 나갔다. 지속 가능한 수익을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불현 듯 가족이 떠올랐다. 한 지붕 아래서 한솥밥을 먹는 가족 못지않게 많은 시간을 공유하는 회사 직원들에게 가족의 의미를 부여하자 속으로 곪아 있던 회사 내부의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기업가 정신에 가족의 가치를 더하자, 회사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가족 정신을 기반으로 회사 구성원의 자발적 변화를 유도해 활력과 생동감으로 가득 찬 회사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취재 박천국 기자 | 사진 최별 기자, 아이팰리SC제공

 
시대에 따라 가족의 모습과 가치가 조금씩 변해 왔지만, 가족의 본질적인 의미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집을 나선 사람들은 돈과 명예, 성공을 위해 촌각을 다투며 살다 보니 스스로 가족의 의미를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웨딩 시장에서 성공한 CEO 반열에 오른 김태욱 대표에게도 가족의 의미는 집 안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기업가로서 돈과 성장을 좇으며 회사를 1등 기업으로 만들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공허함과 불안함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고민하던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는 직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마다 사연과 사정, 고민들이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단연 가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그제야 ‘우리 모두가 가족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비로소 가족의 의미와 가치를 기업 경영에 접목하자 지시와 강요가 없이도 숨이 죽어 있던 기업에 생명력이 감돌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잃고 인생의 항로를 변경

김태욱 대표가 가요계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은 1991년의 일이다. 당시 그는 ‘개꿈’이라는 노래로 데뷔해 1992년 ‘그래 이제부터가 시작이야’로 신인상을 받는 등 가요계에 무서운 신인으로 떠올랐다. 가요 판도를 뒤흔든 최고의 스타는 아니었지만, 그의 노래와 무대를 기다리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레전드’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제작, 유통, 매니지먼트까지 다역을 소화했다. 그러다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전유물인 목소리를 잃게 됐다. 의사는 그에게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을 내렸다. 평생 가수를 업으로 삼고 싶었던 그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많은 앨범을 팔아서 10대가 가수가 되는 것만이 가수로서의 꿈은 아니었어요. 궁극적으로 시대를 앞서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개척자나 가요계 레전드가 되고 싶었죠. 그러던 중 1998년에 목소리를 잃고 나서 인생의 가장 큰 좌절을 맛보게 되었어요. 인생의 목표를 잃은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불현듯 왜 암울하고 슬픈지를 스스로 물어보기 시작했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가슴 속에 들끓던 꿈이 사라진 것이 문제였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왔는데, 목소리를 잃으니 한순간 가슴이 텅 비게 된 거예요. 그러다 결혼 초기 가장의 역할에 대해 고민을 해야 했는데 ‘벤처’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죠.”
그는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예식장, 혼수, 신혼여행, 예물, 한복 등 다양한 산업이 연관된 웨딩시장을 유심히 관찰했다. 10조원이 넘는 방대한 시장인데도 재래적인 방식을 고집하고 서비스 방식도 천차만별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더욱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 ‘고무줄 가격’은 시장 질서를 해치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했다. 문제점이 보이자 해결 방안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사업가 기질이 다분했던 그는 다시 한 번 열정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가졌던 전율이 그의 몸 전체를 감싸는 듯했다.
“누군가에게 투자를 받아서 편하게 사업을 하는 개념이 아니라, 각기 다른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4명이 모여 벤처 회사를 차리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어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사를 할지, 음악을 시작했을 때의 마음가짐처럼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서 전설이 되는 기업을 세워 볼지를 고민했죠. 결국 후자를 선택하게 되더라고요. 가수 활동을 하며 음반 유통 쪽에도 관여한 적이 있어서 유통 사업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유통 분야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웨딩 시장이 끌리더라고요.”
웨딩 컨설팅을 하려면 기업가로서 비즈니스 모델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경쟁력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서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고객에게 확산시킬 수 있다면, 위험 부담도 적고 지속 가능한 사업 아이템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사업에 착수했다.

대기업에 의존하지 않는 벤처 구상

일반적으로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중소기업 경영인으로서 “대기업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상당히 컸다”고 지적했다. 현실의 벽은 분명 높았지만, 그는 다른 각도로 중소기업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기업이 진출해 있지 않지만 네트워크와 노하우를 갖추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내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평소 눈여겨보던 웨딩 시장에 벤처 정신을 발휘하기로 했다. 도전과 혁신의 시각에서 웨딩 시장을 창의적이고 냉철하게 바라보고자 한 것이다.
“기존에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부부들이 경험했을 웨딩 시장의 문제점들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시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을 고안할 수 있었죠. 이를테면 수많은 웨딩 관련 업체들을 발굴해 중간에서 커미션을 챙겨 가격을 부풀리는 구조가 아닌, 투명하게 가격을 오픈해 합리적인 가격을 유도하는 거예요. 이러한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장치를 통해 누구든 동일한 가격으로 같은 서비스를 받고, 무엇보다 문제가 생기면 개선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의 변화가 필요해 보였죠.”
웨딩시장의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하나의 ‘플랫폼’이 되어야 했다. 협력 업체의 데이터베이스와 고객, 그리고 플랫폼이 서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거래와 서비스가 이뤄지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1천여 개 업체의 다양한 정보를 활용해 누구나 컴퓨터 책상에 앉아 개성에 맞는 결혼 준비를 하고, 심지어 정확한 예산까지 세울 수 있게 됐다.
“모든 벤처회사가 그렇지만, 2000년 창업 이후 5~6년 정도는 매년 고비를 맞았어요. 그리고 조금씩 어려움을 이겨내고 경영 안정 단계에 접어들고 보니 어느새 회사를 세운 지 15년째 접어들게 되었네요.”
현재 4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벤처회사는 직원 200여 명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핵심 자회사인 아이웨딩을 통해 결혼을 진행하는 커플 수만도 연간 1만5천 쌍에 달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일반 기업가와는 다른 지점을 지나고 있는 듯했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맹목적인 매출 증대가 아닌, 공정한 경쟁 구조 속에서 지속 가능한 수익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웨딩 시장에 뛰어들었을 때 그가 가졌던 초심은 이른바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지 않고,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리딩 기업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솔직히 지금 편하게 성장하려면 제가 개인적으로 스튜디오, 미용실, 예식장 등을 하는 것이 제일 좋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 회사는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한 가지 원칙을 세운 게 있죠. 바로 ‘시장에서 위너가 되더라도 그것을 무기로 쓰지 말자’고요. 또 ‘우리가 다른 기업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려고 하지 말자’고 뜻을 모은 적도 있죠. 우리가 우리만의 키워드를 가지게 되고 새로운 장르를 만들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웨딩 서비스 그 이상이 될 것이라고 봤죠.”

 
가족에서 찾은 경영과 인생살이의 지혜

단기간에 앞만 보고 달려온 기업은 외형적으로는 견실해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CEO로서 기업 내부에 흐르고 있는 부정적인 기운을 감지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성장을 해야 될 시점이었는데, 내부적으로 힘겹게 막고 있었던 문제들이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10년 넘게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직원들이 하나둘씩 생겨났어요. 목표의식을 상실하고 혁신보다는 안정주의, 그리고 서로 소통에 나서지 않고 숫자에 치여 사는 노예 같았죠. 말하자면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이유를 생각해 봤더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직원들 간에 대화도 부족해지고, 회사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침체되고 건조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과거 회사의 경영난을 이겨내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회사 자금을 확보했던 그가 또 한 번 신발끈을 고쳐 묶었다. 누구보다 해답을 잘 알고 있는 직원들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서 직원들을 향해 먼저 손을 뻗은 것이다. 직원들을 3~4명 단위로 쪼개 소주와 와인, 그리고 그가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진솔한 대화의 장을 만들었다. 그가 진심으로 다가서자 직원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회사에 좋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확인했다.
“회사의 재건 과정을 거치면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어요. 어떤 조직이든 ‘나만의 행복이 어디 있냐’는 것이죠. 우리 전체를 생각하는 콘셉트를 잡게 되면, 전체의 행복으로 이어지고 결국 자연스레 나만의 행복이 찾아오잖아요. 제 생각이 직원들에게도 전해졌는지 비유하자면, 죽어가던 생명에서 향기가 나고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죠. 회사에 동호회가 많은데, 예전 모습처럼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고 업무 효율도 확연히 향상되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화해하면서도, 또 그렇게 만나는 직원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가족의 의미를 떠올리게 됐다.
“우리가 모두 가족”이라는 기업 문화를 ‘가족가 정신’으로 표현했는데 실제로 직원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변화를 보게 되어요. 이게 점점 힘을 얻더니 오히려 직원들 스스로 가족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키워드를 설정해 놓고 대화와 토론하는 방식으로 하나둘씩 풀어나가더라고요. 마치 그들의 관계 속에 있던 응어리들을 하나둘씩 없애 나가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더니 어느 날 직원들이 가족가 정신으로 하나 되는 과정을 책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먼저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회사의 전 직원이 책을 만드는데 동참하게 됐고, 1년 정도 걸려서 <가족>이라는 책이 탄생하게 됐죠. 책이 나오고 나서 직원들이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아마 제가 느꼈던 일종의 자부심을 그들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부적으로 ‘가족 정신’을 강조한 그의 시선은 이제 해외 진출에 향해 있다. 이미 한류 스타 결혼 마케팅으로 중국 내 ‘웨딩 한류’를 이끈 그는 중국을 필두로 아시아 등 세계 각국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워 뒀다.

 
결혼과 가족이 가져다준 위대한 변화

그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음악을 하기 위해 사춘기 시절부터 집을 나와 생활했던 시기, 그에게 가족은 ‘벗어나고 싶은 대상’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장사를 했지만, 그는 자주 사고를 치는 문제아였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와의 마찰도 잦았다고 했다.
“제가 18살에 가수가 되겠다고 가출을 해서 집을 나와 살았거든요. 우리 어머니는 아직도 ‘우리 욱이는 18살에 집 나가서 아직도 집에 안 들어오고 있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하세요. 그런데 그랬던 제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나서 가족에 대한 관점이 180도 바뀌었죠.”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던 그에게 환상처럼 눈부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랜 밴드 생활로 합숙 생활에 익숙했던 그가 결혼 생활 역시 이해와 배려의 연속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밴드 시절 합숙생활 때와는 달리, 가족을 통해 그의 내면에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기주장을 꺾고 아내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점차 성숙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니까 또 하나의 나를 만난 것과 같은 느낌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저의 분명한 착각에 불과했죠. 또 하나의 나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과 다른 점을 인정하고 맞춰가는 과정의 연속이었어요.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니 저에게 변화가 일어났죠. 제가 가진 검은색에 아내의 흰색을 섞으니 멋진 회색이 만들어진 거예요. 특히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되고 보니 결혼과 가족이라는 연결고리가 참으로 위대한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어요.”
책을 본 채시라의 반응은 어땠을까.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최근의 일로 짐작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족>이라는 책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미리 알려주지 않아서 책을 보더니 ‘어어, 진짜’라고 놀라는 모습이었어요.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이 각각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해서 엄마로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책 내용이 감명 깊었는지 틈틈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 읽는 모습을 보게 돼요. 조금은 낯간지러워서 직접적으로 ‘어때’라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책의 판매 수익이 의미 있는 곳에 쓰인다고 하니까 주변에 아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팔기도 하고 그러나 봐요(웃음).”
최근 그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기업 차원에서 다문화 가족, 조부모 가족, 결손 가족을 지원하고 여성들이 쉽게 창업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한 ‘굿바이샐리’가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업인으로서 경영 철학으로 삼아 온 ‘가족가 정신’을 공식적으로 높이 평가해준 데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일자리를 창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막중한 사명감보다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에 재능 기부 형태로 연결고리가 된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요. 세월이 지나고 하나둘씩 늘어난 결과물들을 나라에서 먼저 알아줬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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